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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넘어서_과학과 철학의 만남, 세상에 대한 통섭적 이해를 위해 By Terius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8. 18. 07:58

이분법을 넘어서 - 과학과 철학의 만남, 세상에 대한 통섭적 이해를 위해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좀 더 세부적으로 물리학과 인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성찰적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실제 세상이라는 곳, 이 우주의 단편적 부분의 앎을 우리는 인지할 뿐인 것은 당연하지만,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근원적인 깨달음에 대한 성찰은 더욱 근본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한 질문과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가 어떠한 식으로 연결되어질지 이해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 이전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에 대한 고찰이다. '앎'이란 내면의 들어온 지식의 근본적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해 자기만의 고유한 Process로 진지하게 음미하는 그 태도에서 싹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앎의 싹이 트기 시작한 후에는 이를 건강하게 자리잡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통섭적 스펙트럼이 함께 존재해야만 올바른 실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분법을 넘어 이 세상, 우주에 대한 전체론적 앎은 학문과 인생, 과학과 철학, 물질과 의식 이 모두를 함께 음미하고 고찰한 후 진지한 태도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그 전제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전제는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단호하게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태도 뒤에는 내가 안다는 자만적 태도를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앎' 은 매우 무서운 것이다. '앎'은 어떤 사람에게는 '암'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고, 올바르지 못한 태도에서 비롯된 앎은 결코 온전하지 못하며 건방지기까지 하다. 

 

'앎'에 대한 온전한 태도는 수 많은 개념의 틀을 건강하게 흡수 할 수 있다. 고로, 바라봄으로 알 수 있는 이 우주에 대한 다양한 이해, 다양한 개념의 안경으로 수 많은 모습으로 세상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앎에 고착되거나 다양한 개념의 안경을 끼고도 이에 대한 온전치 못한 태도는 진정한 자신의 진화를 발목잡는 무서운 암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앎에 대한 깨끗한 시선과 태도가 분명히 요구되어진다.

 

앎은 또 다른 앎을 불러오고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의 의미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여기서 앎을 통해 그 다음 지식을 체화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것을 그 전의 지식으로 맥락상 연결되어 흡수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한다. 사실 잘못된 앎도 무섭지만, 그 전의 지식과 그 다음의 지식이 맥락상 자연스레 이어진다해도 분명히 '당연히 같은 흐름, 같은 맥락속의 길'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언제나 우리는 틀릴 수도 있고, 어쩌면 아예 모를 수도 있다는 그 태도로 앎에 대한 발전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자각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도 하지만, 자각을 직면해야 하는것도 우리의 한계를 건강하게 수용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 수용은 한계의 초월을 위한 조건이므로 이는 필히 앎에 대해서 깊이있는 숙고의 과정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결국 이분법을 넘어서 진정한 앎의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지식과 그 개념적 틀, 의미의 이해를 통합적으로 사유하여 엮어낼 사고력이 요구된다. 세상의 모든 언어, 문화, 학문, 국가 모두 유기적으로 실질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전체속에서 유기적으로 살아움직이는 통합적 흐름의 연결고리는 결국 끈질긴 이해력과 명료한 태도, 언제나 모를 수 있고 틀릴 수 있다는 비장한 겸허함이 우리를 통섭적 세상의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게한다. 근본적인 바탕의 상호성이 총체적인 학문의 흐름을 이어주는 것이고 이러한 앎의 씨앗이 깊은 이해의 창발점이 되는 것 아닐까.

 

 

by Ter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