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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학문으로, 이성으로, 언어로 절대! 절대적인 것을 알 수 없다.

BU editor 2014. 4. 6. 22:53

인간은 학문을 통해 유용성을 얻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애초에 인간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또 서로 인식한 바를 나누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냈다. 즉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앎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해 내가 '안 것’을 설명하고, 의사소통하는 '유용성'을 마음껏 누린 대신 '절대성'이라는 대단한 무언가를 놔버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앎'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지만, 그 '앎'을 100%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언어는 약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엄청난 한계를 가진다. 평소에 쓰는 언어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인다. 특히 학문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언어는, 실제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사전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의 뜻을 찾고, 뜻풀이에 나와 있는 단어를 또 찾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폐쇄적인, 순환하는 원을 만든다. 결국 최초로 정의된 단어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언어인 것이다. 이는 언어가,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해 표현되는 학문, 논리, 인간의 이성 또한 절대적인 것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인간은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사고하지 못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결코 앎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인식론을 발전시켜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건지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생기게 됐다.(물론 이 또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인 언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론의 연구는 '철학'적 사고의 본질이 된다. 그리고 이 인식론이 심층적인 수준에 접어들어 '인간이 사물, 세상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학문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학문을 만들고 공부하게 됐는지 그 시발점을 찾는다면 그 중심엔 인식론을 본질로 한 철학과 과학이 있다. 그래서 학문을 시작하는 시점이 있는 사람이 철학사, 과학사를 공부한다는 건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어떤 책을 읽어도 대부분 철학과 과학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그게 바로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링크 포인트가 된다. 그걸 모르고 그냥 개별적인 지식만 공부한다면 그냥 조각 모음하다 끝날 수 있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 그리고 철학사와 과학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단단한 지적 기반을 쌓을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도 평생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진짜 열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본질, 과학, 철학 어느 것 하나 중요시하지 않는다. 각 분야별 전문가의 무지일 수도 있고(이게 학문의 기반일 거라 생각 못하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행사하려는 정치적인 펜듈럼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결국 단절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단지 학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스스로의 세계에 갇히고, 관계적으로도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다. 과학사, 철학사를 보면 시대가 어떻게 순환하는지 그 원리를 알게 되는데, 이 사실을 깊이 알면 삶을 근시안적으로 살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과학사, 철학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봤는가'와 관련한 수많은 관점들을 알게 된다면 사고가 더 확장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더 열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철학과 과학을 뺀다는 게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삼성, 마이크임팩트, 여러 대학, 방송사 등에서 많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가’하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인문학의 본질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기반이 어떠한지 모르고, 그저 인문학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인문학의 본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풍요롭게 하고, 교양을 쌓는 데에 의의를 둔다면 상관없지만. 이는 내용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모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인간이 단어 하나를 만들고 정의하는 것은 끝없는 지知의 우주를 개척해나가는 것과 같다. 마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캐릭터가 움직여 지도가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가 없으면 사고력의 확장도 없다. 하지만 정의는 왜 그런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약속’의 과정이며, 언어를 통한 사고와 판단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는 말로는 절대, 절대적인 것을 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렇게 자명하게 실존하는 ‘나’가 누군인지도 절대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의식 수준이 1~1000에서 400대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으로, 학문으로, 언어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으면, 머리로 이해가 안되면 존재하지 않으며 거짓인 걸까? 학문은 우리에게 굉장한 유용성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모든 학문은 세상을 한 측면에서만 설명하기에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유용성으로 인해 그 학문만을 맹신하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심판해 결국 고립되는 등의 피해를 볼 수 있다. 학문을 깊이 하기 전, 내가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자각하고,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진짜 지혜를, 올바르고 건강한 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의 시작과 태도의 시작은 같이 간다.


by Audr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