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있던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 후기를 수정/보강했습니다.)


학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과 과정에 대해 공부하는 건 학문을 넓고 깊이 파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한다. 학문의 실체를 알아야 환상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 사실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반 대학에서는 이 내용에 대해 접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책의 1장은 대학을 대신해 우리가 기존에 갖은 학문에 대한 환상 또는 오해를 산산히 부시고, 이론이 무엇이고, 학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보게 만든다.


우리의 몸이 처음엔 단 하나의 세포로 시작해서 수많은 분열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모든 학문도 단 하나의 명제에서 시작했다. 학문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명제가 ‘공리’인데, 공리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히 자명한 법칙’을 뜻한다.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데, 자명해 보이므로 공리로 하자고 ‘약속’한 것이다. 학문을 지탱하고 있는 최초의 기둥이 약속이라니! 누가 생각해도 학문의 기둥은 단단하고,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약속만 다시 하면 사과가 배로 불려도 상관없듯이 그 기둥은 실제로는 전혀 단단하지 않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기본 공리를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기하학은 매우 객관적이고, 정교하며 완전한 학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느 학문처럼 기하학을 만든 최초의 공리는 증명되지 않다. 따라서, 만약 공리에 오류가 있다면 기하학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학문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우스가 기존의 평행선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꿔 놓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었다. 이는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지만, 학문 안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모순’도 공리에 의해 존재하는 개념일뿐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관측된다. 상식적으로는 빛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즉 말이 안되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위의 사실이 맞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모순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은 특정한 틀 속에 있을 때만 발견된다. 그리고 그 틀을 받치고 있는 건 약속으로 만들어진 공리이다.


    실재   |   공리   →   논리   →   정리   →   이론   →   학문


빛이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존재한다는 건 실제로 관측된 ‘실재’이다. 하지만 약속은 '실재'를 담아내는 게 아닌 인위적인 무엇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실재'보다 논리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약속으로 이루어진 공리, 그리고 공리로 이루어진 학문은 결국 위의 관측 결과를 담아낼 수 없는데, 바로 이 사실을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학문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의 세상은 진리 위에 기초한 게 아니라, 약속 위에서 세워졌다."


애당초 수학, 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시작을 보면 그 속엔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치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근거로 하나의 세계관이 구축된 것이다.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이다. 뉴턴의 방정식이 왜 그렇게 구성돼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용하게 쓰이기만 한다면 오케이다. 이렇게 학문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문해석학을 사이비 학문이라고 깎아내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이 학문을 공부해도 괜찮을까? 이게 정말 맞는가? 왜 이렇게 된다는 거지? 라는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기존의 관점과 다르고, 기존의 논리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니다. 학문은 그 틀안에서 논리적으로 문제없는 결과들이 도출되기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떠한 학문도 '실재'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기에 특정 학문에 집할 필요도 없다. 자료가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배열되는 게 진실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그 틀 안에서만 진실할 뿐이다. 한쪽의 시각만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걸 증명한다는 건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지고, 자신이 만진 부위만을 코끼리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의 마인드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찾기 애쓴다는 걸 인식하고 마인드적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 우리는 학문을 대할 때, 그저 '도구주의적' 입장을 취하면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되는가, 즉 유용성에 따라 학문을 취할지 버릴지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언어로 인해 구분된 학문의 경계를 알고,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러 학문들을 통합할 수 있고, 거기서 나오는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생소하거나 쉽게 공부하지 못했던 학문도 두려움이나 이질감 없이 접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과 경제학은 나누어진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자도 어디가 경계인지 말할 수 없다. 현재 보이는 경계는 단지 약속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 거기엔 근거가 없다. 이름이 붙여지는데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이론은 다면적인 현실의 특정한 한 측면을 보여줄 뿐이다.


유용성을 얻기 전에, 유용성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성 또한 알아야 한다. 학문할 때, 도움이 되는 부분까지만 취하는 걸 넘어서, 이것만이 맞다고 집착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신념을 형성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편협한 사고는 또한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가둘 수있다. 하지만 이 역시 좁게는 학문이, 넓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실재’에는 약속을 토대로 만들어진 학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널렸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학문이 실용적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게 사실이다.


학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된 건지, 왜 경계가 생겼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학문하는 태도를 갖추게 만든다. 학자적 태도를 갖춘 사람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을 열린 태도로 검토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삶에서 일어나는 '실재'들, 예를 들면 인간관계, 소통, 결혼, 일 등을 경험할 때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학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연구를 통해 굴러가는 이 세상 위에 올바르게 서있을 수 있는 힘이 된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