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



(1) 부지런히 노력하라

-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정성만 가지고는 안된다. 마음을 확고하게 붙들어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설렁설렁 건들건들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오로지 마음을 다잡아 매진해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 흘려듣지 말라


(2) 꾸밈없이 소통하고, 되풀이해 검토하고 따져서 오류를 파악하라

- 현재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할 것


(3) 좌절과 역경에도 근본을 잊지 말라

- 좌절 속에서도 미리 깨어 준비하라.




2. '최고의 공부'



(1) 학습된 무기력을 극복하라

- 과학자들은 유별나게 똑똑해서가 아니라 끈질긴 것이다.
- 내적 동기의 위력을 깨닫고 자신의 관심사를 관리하면서 '분별없는 오만함'과 '무력감'을 피할 수 있다.


(2) 사고의 틀에서 탈출하는 방법

- 우리의 뇌가 현실을 구축한 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 과정을 우리가 직접 이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바로 그 구조를 이용해 세상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의 생각에 의문을 던지고, 기존의 사고의 틀이 지어 놓은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3) 노력하면 성장할 수 있다

- 결점을 회피하기만 해서는 창의적인 삶을 일굴 수 없다. 그보다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은 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by Hakuna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BU 수업 후기 _ 진짜 공부란 무엇일까?

BU_class 2014. 6. 12. 10:22

'진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짜 공부는 최첨단 고급학문과 고급정보들을 접하고 배우고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화가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마구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우리나라의 주입식 공부와 다를 바가 없다. 공부는 '태도'로 하는 것이고,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짜 공부의 핵심이다.


진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어쩌면 그 근본까지 건드리며, 필요하다면 뒤집어엎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즉 '나의 마음'과 '태도'에 대한 공부가 동시에 함께 가는 것이 진짜 공부다.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이 왜 진짜 공부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는 산을 깎는 '인내'를 요구하는 진짜 공부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과 진짜 공부의 필요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고 이 역시 '나'에 대한 공부가 수반된다.


잘 살고 싶다.


나의 주도권을 따라서 자유롭게 내 존재대로 사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만나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 일과 돈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정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삶을 살고싶다.


빠른 사회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대처해나가는 삶을 살고 싶다.


그냥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


언제나 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삶을 살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온전히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목적에서 진짜 공부를 하려 했고,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BU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진짜 공부를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서 나는 내가 진짜 공부를 할 자격이 있나 의심스럽다.


자기변명, 합리화, 어중간한 태도, 묻어가기, 의존하고 싶은 관성 등등을 제대로 직면하고 다루어야 하는 진짜 공부를 나는 하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by Elizabeth Taylor P.



posted by BU editor

'의식혁명' 4,5, 20, 23장 후기 by Audrey

BU_class 2014. 5. 8. 21:29

인간의 마음은 원천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인간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인류가 그토록 갈등을 겪어오고, 한 개인이 의식 성장을 충분히 이뤄내지 못한 이유다.


마음의 가장 큰 한계는 이원적으로 사고한다는 데에 있다. 이원적으로 세상을 보기에 하나 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 또한 인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나의 생각이 언제나 옳다'라는 전지적인 성향을 고수하고, 이를 좀처럼 놓아버리지 않는다.


'이원율'의 끌개 척도는 460으로 측정된다. 이원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이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학문적 관점에서는 탁월한 성과를 내지만, 이를 통해 영적 진실을 이해하고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실제로 의식 연구를 과학적 맥락을 통해 풀어낼 때의 큰 걸림돌 중 하나가 '이원적으로 사고하는 마음'이다.


자신이 올바르다는 것을 고집하는 마음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매우 큰 폭의 의식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맥락들에 대해 저항하고 거부한다. 정말로 의식의 도약을 위해선 '나는 언제나 맞다'라는 환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의 신념이 헛되다는 걸 경험하는 것도 때론 필요한데, 그래야지 '겸손한 태도'를 배워나갈 수 있다.


생각이 '나'가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믿는 것을 무조건 믿어서도 안된다. 언제나 자각하고 진실이 아닌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과 멀리 떨어져 초연히 관찰하는 '자각'의 과정이 언제나 필요하다.


마음과 에고를 지닌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의식의 성장을 이루는 것, 그리고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 이 엄청난 것들을 '도구'를 통해 이뤄낼 수 있다는 건 인류 전체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진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영적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첨단 과학의 연구와 의식 연구의 진전으로 사람들이 의식의 본성에 눈을 뜨고 좀 더 객관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됐다. 때문에 의식의 성장을 이루고 진실을 밝히는 것은 더 이상 영적 지도자, 철학자, 과학자들만의 몫이 아니게 됐다. 개개인 모두 온전한 관심이 있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스스로를 높은 수준에 조율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할 수 있고, 일상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거짓이 우리에게 해롭다는걸, 온전하지 못한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그 세계에 달려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지각이다. 단순하게, 지각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관점을 포기하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한다. 그래서 그만큼 변화와 성장이 더디게 진행된다. 하지만 우리는 호킨스 박사의 연구 결과물들을 통해 의식의 본성의 밑그림을 이해하고, 무수한 끌개장들의 작용으로 나타난 이 세계의 본성의 밑그림을 이해함으로써 기존의 관점들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다. 의식의 진화는 의식 자체의 본성이 어떠한지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그 이해가 더 깊어질수록 의식 수준 또한 성장한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책 '최고의 공부' 후기(Audrey)

BU_class 2014. 4. 23. 01:23

'최고의 공부'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 책은, '최고의 공부스킬'이 아닌 '최고의 공부를 하는 주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우선 진짜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고,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의 시작이자 끝이다. 단순히 학습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 인생 전반을 다루고 있다. 학습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주체로 두고, 내면에서 동기를 찾고, 스스로 학습을 관리하고, 나한테서 보상을 얻는 것. 말은 쉽지만 과연 ‘자기 사랑’ 없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끊임없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사고를 성찰하고, 나의 의도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가볍게 제낄 수 있으려면, 그리고 이 과정을 지속하려면 매우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절대 외부에서 얻을 수 없으며, 얻더라도 나의 진정한 성장을 위한 추진력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창의성의 본질 또한 외부에 잊지 않다. 자기 자신이 되고, 나만의 독특함을 발휘한다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창의성'은 사전적으로, 비범한 아이디어를 산출하거나 또는 전통적 사고 유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형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비범한 아이디어, 새로운 유형은 결국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에서 나와 100% 똑같은 사고를 하고,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없다. 고유한 나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창의적인 활동인 것이다. 우리는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간단한(하지만 쉽지 않은) 방법을 두고 누군가가 되려고 하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사고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본래 창의적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잠재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많은 학생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심어진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 나로부터 나온 에너지가 아닌 '가짜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배움에 열정을 느끼지 못해 피상적 학습자로 전락해버리고, 실패가 계속되면 배움 자체에 염증을 느끼거나 부족한 실력을 내 전반적인 능력 부족으로 확대해석한다. 반면 '최고의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열정으로 기꺼이 지적 모험을 즐겨 놀라운 통찰을 얻는다. 그리고 열린 태도로 학문을 대하며, 실패하는 경험도 포용해 거기서 교훈을 얻는다.


피상적 학습자는 사회에 나가서도 매사에 피상적인 접근을 하게 되는 반면, 최고의 학습자들은 대학 때의 지적 모험 경험을 기반 삼아 그 이후의 삶에서도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활동들을 해나간다. 그들에게 사회는 나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놀이터와도 같다. 나만의 능력과 관점으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그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재밌는 일이다.


사실 이 책의 내용들은 초중고등학교때부터 활발히 가르쳐져야 한다. 내적 동기가 아닌 외적 동기에 휘둘리지 전에. 어느 분야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열정이 식기 전에.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개발하는 걸 방해하고 있다. 왜 국어선생님이 읽어주는 시 해설을 무조건 암기해야 하고, 왜 수학 공식의 원리를 몰라도 된다고 하는 걸까? 잠재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장의 성적 1, 2점 올리는 것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에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 전반적인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자신감을 잃고, 진정 원하는 공부 분야를 말하면 돈 벌기 힘들다며 다른 분야를 권하는, 피상적이고 전략적인 학습법을 부추기고, 깊이 있는 학습을 방해하는 문화가 한국 교육제도에 너무 뿌리 깊다. 그렇게 외재적 동기에 의해 공부해서, 사회적 성공 기준에 맞게 사회에 나간 사람들한테 묻고 싶다. '그래서 만족하는가?' 주변만 살펴봐도 전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언니 친구만 해도, 번듯한 직장에만 들어가라는 부모님의 말만 듣고 제일 '좋다는' 경영대에 들어가고, 조건이 '괜찮은' 아무 직장에 들어갔지만 현재 내적으로 매우 '안 좋고, 안 괜찮은 상태'에 있다. 자신이 잘하고, 열정을 쏟는 일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공부하는 법을 배우는 이유, 그 중심에는 ‘자립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배우고, 책을 읽어도 자신이 주체로 서지 못하고,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면 지식은 그저 지식으로만 남을 뿐, ‘지혜’가 되지는 못한다. 공부는 평생 동안 해나가는 과정이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배우는데, 그 배움을 지속시키는 힘이 바로 '올바른 공부법’이다. 그리고 올바른 공부법은 단순히 성적을 올리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식을 담아내는 그릇은 본인 그 자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나의 취약함도 수용한다면 어떤 지식을 접하든, 어떤 경험을 하든 모두 배움으로 받아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혁명'에서 말하는, 내면을 추구하고 삶에 의미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책 '의식혁명' 후기

BU_class 2014. 4. 15. 02:08

수 세기 동안 영적지도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줄곧 우주는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고,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이며, 보이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오고, 이 세상에 무의미한 사건은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말들이 과연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사실들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체계적인 근거, 체계적인 학문을 통해 설명이 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의식 연구와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첨단 학문들이 위의 말들이 모두 사실임을 입증해나가고 있다. 이렇게 인간 의식과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학문들이 점점 체계적인 틀을 짜나가며 영성 과학의 시대를 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운동역학'은 인간이 우주의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 의식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결과들을 도출해내고 있어 눈여겨볼만하다.


운동역학은 신체의 조건에 따라 작용하는 근육과 그 움직임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학문이다. 20세기 후반 조지 굿하트 박사가 몸에 좋은 물질에는 근육의 힘이 증가하는 반면, 몸에 해로운 물질에는 근육의 힘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 후 존 다이아몬드 박사는 이 사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물질적인 자극뿐만 아니라 감정적, 지적 자극에도, 심지어 공공연한 진실과 거짓의 내용에 따라 근육이 강해지고 약해지는 작용이 모든 사람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수많은 반복된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1975년부터 이 이론을 더 발전시켜 인간 의식에 대한 스펙트럼과 진실과 거짓에 대한 운동역학적 반응을 연구하고 있다. 이는 마음만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육체 또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주체임을 알려주며, 심지어 마음의 의식보다 몸의 의식이 디지털적 반응을 통해 더 클린하게 답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특성 덕분에 운동역학을 통한 의식 연구는 학문적 틀을 체계적으로 맞추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간 의식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고무적인 발견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오랜 연구는,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하는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에 인간의 의식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인간에게는 본래 긍정과 부정, 그리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칼 융이 말하는 ‘의식의 데이터베이스’는 어느 종족에게나 특정 잠재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공통된 체험인 ‘집단 무의식’이 조직적인 패턴으로 특정 지을 수 있는 인간 의식이 숨겨진 곳이다. 때문에 의식의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축적된 사고와 경험의 모든 발자국이 담겨 있으며, 인간 의식에 유용한 정보,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호킨스 박사는 이러한 의식의 데이터베이스 개념과, 운동역학에서 질문을 통해 이원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을 연결 지어 의식의 지도를 만들고, 의식 연구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운동역학의 핵심 개념은 ‘끌개’이다. 끌개는 비선형 동역학(카오스 이론)에서 나온 개념인데, 겉으로 봤을 때 전혀 의미 없고 무질서해 보이는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동일한 패턴에 주어진 이름이다. 첨단 컴퓨터의 도움으로 ‘동일한 패턴’이 8자가 여러 겹 겹쳐진 형태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끌개의 발견으로 수천 마리의 물고기 떼가 부딪히지 않고 헤엄치는 현상 등 기존의 과학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던 기이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바로 ‘끌개'라는 에너지 패턴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끌개라는 개념을 통해 삶과 세상의 복잡성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끌개로 인해 논리적인 상관관계를 중요시하는 기존의 과학이나 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현상들이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끌개의 발견으로 특정 현상을 기존의 학문처럼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한 사건이 A→B→C라는 시간순의 인과관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ABC라는 보이지 않는 끌개 패턴에 의해 보이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ABC의 개념이 눈에 보이는 우주에서 A→B →C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현상'에서 '보이는 현상'이 도출된다는 설명은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우주를 보이지 않는 질서와 눈에 보이는 질서로 이루어진 홀로그램에 비유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호킨스 박사는 한 사람이 속해있는 의식의 장의 끌개 수준은 마음과 육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운동역학적 측정 방법을 통해 의식지도를 완성했다. 여기서 의식지도는 각 레벨의 끌개장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며, 끌개 장은 인간의 존재와 그 가치를 정의하고, 사고에서 행동까지의 에너지 패턴을 관장하는 요소이다. 우리는 결코 끌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 그 너머에는 특정 사고를 유발하는 끌개 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성에 따라 행동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인식의 패턴이 작동했을 뿐일 때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류의 문명과 역사의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고, 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과, 호오포노포노에서 말하는 정화의 당위성에 대해 학문적 근거가 충분히 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 레벨을 수치화해 대수로 나타내고,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인간의 몸이 단 몇 초만에 정보를 얻고, 진실과 거짓을 가린다는 내용은 사실 감정적으로만 접근하면 굉장히 거부감이 들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운동역학이라는 학문은 기존의 논리적인 과학과는 관점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학문의 원리를 이해하고, 학문적 태도를 가진 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학문이 정말 타당한지, 인간의 의식을 잘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선형적인 과학은 삶의 근본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뉴턴 물리학의 사고관, 즉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뛰어넘지 못하면 오히려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의 본래의 목적이 달성되기 힘들다. 하지만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이론 물리학, 운동역학 등 첨단 학문들은 이 관점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첨단 학문들의 최대 업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이해했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역학의 근반응 검사가 위치하는 끌개의 수준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선다. 따라서 끌개라는 개념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첨단 학문들도 '끌개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지, 왜 존재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아인슈타인의 E=MC^2 방정식이 왜 그렇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존 학문의 관점과 다르다고 감정적으로 배척하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 아무리 관점이 다르고 이전의 논리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니다. 학문은, 그 틀 안에서 논리적으로 문제없는 결과들이 도출되기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자료가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배열되면 그것이 진실처럼 보이지만, 그 틀 안에서만 진실일 뿐이다. 만물의 진리는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학문은 결코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인간의 본성과 삶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의식혁명'에서 말하는 운동역학은 이 사실을 바탕에 두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학문적 맥락을 통해 학문에 접근해 나가야 한다.


운동역학은 인간의 경험과 앎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모든 경험들은 인과관계에 따라 일어나는 게 아니라 끌개의 작용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현상들이 일어났음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또한 인간의 몸을 통해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우주에 저장된 정보들을 열람할 수 있는 것 또한 밝혀졌다. 이러한 열람이 가능하다면, 이는 개인과 집단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려 더 높은 에너지 패턴에 접속하게 해 삶에 대한 태도를 전혀 다르게 바꿔 삶의 질을 높이고,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할 것이다. 또한 역사 탐구나 미래 발전에 큰 공이 될 수 있다. 모든 사고, 경험은 우주에 저장이 되고,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알게 된다는 발견은 인류에게 커다란 선물과도 같다.


운동역학은 겉보기의 원인을 초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이렇게 운동역학을 비롯한 첨단 학문들을 통해 인간 의식 자체의 본성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감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전혀 새로워질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자유의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때문에 영적 의지를 사용해 내면을 추구하고 삶에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로 이 점이,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배움의 기회가 되고, 내가 성장할 수 있게 하는가를 결정지을 것이다. 인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삶에 대단한 실용적인 이익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혁명'에서 말하는 '운동역학'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책 '최고의 공부' 후기(Elizabeth)

BU_class 2014. 4. 14. 23:49

그동안 '최고의 공부'를 읽고 나의 생각을 쓰는 일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다. 후기를 쓰는 일은 내가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의문들에 답해야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나 불편했고 숨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나의 모든 것들에 대해 또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단순히 내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공부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만의 특별함은 무엇인지, 나는 왜 공부하고 있는지'와 같은 내적인 문제들이 머리를 들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듭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사랑함과 동시에 제대로 공부해 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최고의 공부'의 핵심 내용은 '내재적 동기로부터 유발된 진정한 공부를 하라.'이다. '내재적 동기'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비롯되는 동기이고, 그것은 그 어떠한 동기보다 강력하고 위대한 힘을 갖는다.


사실 '내적 동기'에 따라 학습을 했던 창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음은 물론이고, 삶의 전체적인 부분에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들은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전제인 '인간의 기본적 본능'에 따라 충실히 살아갔을 뿐이다. 즉 '외부 동기'에 의해 떠밀려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대로 실현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올바른 '태도'와 진정성 있는 '생각'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노력'으로 인해 발생한 '외부의도'가 그들을 도와준 것이다.


그들이 '내적 동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메타인지적 사고' 였다. 그들은 내가 어떤 자질을 지니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 인생만의 특별한 경험은 무엇이고 그로부터 무엇이 나의 가치관을 형성했는지,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능력들을 통합할 수 있는지 등등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고 발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역량을 제대로 올바르게 쏟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창의적인 사람들은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의 사고에 대해 생각하는 '메타인지적 사고'를 한다.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고정관념과 편견에 취우치지 않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공한 학생들은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을 중시했다. 그들 대부분은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바람직한 자아상과 자신이 창조하고 싶은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또한 정의감과 연민을 길러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가치관대로 움직였다. 즉 자신만의 문제에만 골몰한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며, 세상과의 상호 의존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불편했던 이유는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 때문이었다. 지금 현재 나는 나의 공부 목적과 이유를 '나 자신의 문제 해결'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말하는 훌륭한 학생들처럼 사회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나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성장할 가치가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에게도 학창시절에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던 경험이 있었다. 바로 정치 교과서 맨 뒷부분에 있는 '헌법'이었다. 헌법 제10조를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 심장이 뛰었고, 평생 이 구절을 실현시키며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라나는 학생들을 나처럼 세상에 휘둘리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는 생각으로 사회 선생님을 꿈꿨고 인권 변호사를 꿈꿨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나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튼튼한 기반 또한 없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결국에는 나 자신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나를 가두곤했다. 나 자신에 대한 문제로 인해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데 공동체를 위한 일을 하고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작년 여름 코치님의 강의를 듣고 추천해주신 책을 읽은 후로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NOT SELF로 조건화된 마음과 우유부단하고 어벙벙한 모습은 아직 여전하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가치관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의 모든 것이 RESET되어 백지상태가 된 것이다. 나는 지금 백지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것으로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휴먼 디자인을 실험함으로써 나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계속 해나가야 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원리를 배우고 기반을 쌓기 위해 BU를 통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허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진 것처럼 나 자신이 아닌 공동체에 기여하겠다는 공부 목적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실현할 수 있는 힘조차 없을 것이다.


실제로 최고의 학생들의 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서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질 줄 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자기 연민이 뛰어난 최고의 학생들은 실패를 무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힘차게 목표를 향해 달려나간다. 그들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 목적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데서 큰 기쁨을 찾았다.


나또한 현재 나의 공부 목적이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나 자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존재로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만의 강점과 특별함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점차 단단하여 흔들리지 않게 되면 다시 예전처럼 공부 목적을 사회와의 관계 속으로 이동시키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BU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면서 코치님을 만났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다. 코치님께 나의 인생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코치님의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에서 내가 큰 힘을 얻고 있고, 내면 깊은 곳에서 따를만하다고 인정되는 스승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또한 내가 스스로 나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도록 깨끗한 정보와 깨우침을 주시는 코치님을 매우 존경한다. 코치님이 그동안 많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코치님의 신념을 지켜왔기에 지금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코치님의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나 또한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생을 밝게 비춰주고 싶다.


앞으로 나의 책에 어떤 주제와 새로운 이야기들이 쓰일지 너무나 기대된다. 내가 나의 삶을 기대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앞으로도 우리의 삶은 두근거리고 즐거운 '놀이'와 같은 것임을 잊지 않고 힘 빼고 천천히 제대로 걸어갈 것이다. 


by Elizabeth Taylo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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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U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BU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BU는 21.5세기를 위한 '창조적 지식'을 위한 곳이다. BU는 진짜 공부의 줄기를 잡아준다. BU는 그러나 양적인 공부는 해주지 않는다. 이는 각 개인의 몫이므로. BU가 실현하는 공부 방식은 이러하다. '양과 질'을 동시에 흡수하는, 추구하는 방식. 그것과 더불어 일정한 기간 동안 '음미'를 해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내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최고의 공부'라는 책에서 켄 베인이 말하듯 공부는 '태도'에서 많은 것이 좌우된다. 그리고 그 '올바른 태도'는 자신의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진정성 있게 선택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자기 스스로 진솔하게 의도하는 '공부', '지식'이 아니면 이미 양과 질, 음미, 응용... 이런 것들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진정성 있는 學의 길로 인도하고 스스로 존립 가능케 하는 참 사부師父로서의 학교다. 물론 사부師父도 있다.(Mr.Paul) 그러한 점에서 BU의 공부는 나에게 진짜 공부를 가르쳐줄 유용한 배움터이다. 양과 질, 음미... 아직은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조건화되어온 공부Style은 '결과'가 목적이 되는 '학점'이 목적이 되는 '등급'이 목적이 되는 그런 껍질을 핥는 식이었으므로.


물론 '결과'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16-23절 말씀 묵상] 이러한 구절이 있듯(난 종교가 없지만) 일의 결과는 언제나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조건화된 더러운 공부법은 내게 허술한 열매만을 안겨줄 것이니. BU는 내 인생의 참 열매를 맺는 그러한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그 방법은 내가 해온 습으로 인해 더 힘들 수도 있다. 농약 범벅 농사법보다는 건강한 유기농 농사법이 더욱 많은 땀을 요하듯 처음엔 더 늦어 보일 수 있다. 더 피곤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에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1세기는 창조적 지식사회이다. 『창조적 지식사회』

그러면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실체』, 『지식의 본질』


당연한 말이었지만 충격적이었다. 21세기 창조적 지식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지식'의 本에 대해 알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불패이듯, 나를 알고 지식의 실체와 본질을 알아야만 배움에 능하게 된다. BU는 나에게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다. 



2. 인간의 '언어' 가 폐쇄적인 원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Mind로 정의한 공리에서 탄생한다. 개를 개라고 하고, 고양이를 고양이라 하는 Mind의 정의 + 공리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돌고 돈다. 대백과 사전의 두께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국어사전을 보라.


A를 설명하려면 B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C를 설명하려면 D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

Z를 설명하려면 A라는 어휘가 필요하다.


단편적으로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보았다. 즉, 언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A와 Z라는 언어는 현상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그들 간에 배타적으로 보인다 하여도 결국 돌고 돌아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진실은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언어는 예외 없이 상대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언어'라는 것은 '맥락'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존재다.


자,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녀석으로 기술되고 정리되는 '개념槪念'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것인가? 이쯤 되면 계산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절대적으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개념은 없다. 개념은 인간의 Mind로 공리화한 언어 텃밭과 논리 속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 또한 언어와 같이 절대적일 수 없는 놈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에 대해서도 다시 볼까.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언어와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개념이 '학문'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학문'은 예외 없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Mind로 정의한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적인 진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 이것이 이 학문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학문은 우리 인류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다. 무엇의 목적으로? '실용성' , 이것이 학문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성과 언어, 논리로 기술되는 학문은 그저 삶의 유익한 Skill, Practical Solution을 주는 역할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학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자의적으로 돈과 관련하여 구분 지을 수는 있으나 엄연히 다른 말이다. 그리고 옳지 못한 표현이다. 세상의 '학문學問'은 실용성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이상의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순 없다. 


그럼 여기까지의 맥락에서 다시 '언어'의 포인트로 돌아오자면, 인간의 언어는 실용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특히, 학자라면 자신의 영향력만큼 언어의 사용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언어가 실용적일수록 그만큼 위험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문을 다루고 그 속에서 유익을 맛보는 인류는 한편으론 학문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WHY? 학문은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학문을 한다고 하면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밝혀 줄 것이란 희망 속에 산다. 그리고 그런 생각 속에 다른 것들을 도외시하고 잘 돌아보지 않게 된다. 내가 하는, 내가 주장하는, 내가 믿고 있는 이 개념, 학문은 절대적이니까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기서 적지 않은 위험요소들이 그 자신을 거꾸로 고립시키기도 한다. 많이 공부할수록 똑똑해지지만, 동시에 여러 위험도 생겨난다. 


인간의 'Mind'와 '학문學問'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화두를 던지는가?


수 많은 학문을 접하게 되고 실용성을 이끌어 내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함을 인지하여 즉 '내려놓음下心'으로 절대성을 내려놓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태도Attitude'로부터 비롯되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므로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케 하려면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받아들이게 되면 지식의 본질, 실체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 가능하다. 지식을 학學하기 전에 지식의 본질, 실체를 알아야 실용성에 대한 유의미하고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이는 '절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공부의 첫 순서, 첫 단추다.




by Terius

posted by BU editor

'줄탁동시啐啄同時' -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때,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고, 바깥에서는 어미도 동시에 쪼아야 성공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 사자성어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옴에 있어서 '안'과 '밖'의 작용을 중시한다. 병아리 혼자서만 쪼는 건 무리일 수 있고, 어미만 쫀다면 병아리는 제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이는 변화하고자 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특히 알을 바깥에서 직접 깨주길 바라고만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의 경험과 관련해서 이 사자성어는 내가 진정 '줄'의 태도를 먼저 지니고, '탁'의 힘을 적절히 이용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안에서 껍질을 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밖의 힘을 찾고자 할 것이고,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적인 욕구가 먼저 들고 태도가 돼야지, 외적인 압력도 나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추진력으로 삼을 수 있다. 책 '전략적 공부기술' 중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놀이는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고, 내면적인 욕구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기가 외부에서 온다면 놀이도 일로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내인적인 동기가 강할수록 일이 놀이로 생각될 수 있다.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 대부분은 변화의 주체를 '나'보다 외부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bs다큐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를 보고 ‘왜 우리는 대학이나 갔는데 알을 스스로 깰 수 없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됐다. 이 다큐는 성적을 위한 성적,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하도록 되어 있는 우리나라 교육 펜듈럼에 학생들이 거의 모든 에너지를 다 바친 결과를 잘 보여주고, 공부하는 주체가 '나'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끊임없이 기준을 '나'보다 사회적인 잣대에 맞추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걸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은, 강의 시간의 질문은커녕 질문을 하면 눈치를 주는 모습이었다. 반면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는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게 자연스러운 수업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내면적인 욕구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가 일로 느껴지는 거고, 그래서 질문도 나오지 않게 된다. 삭막하고, 어색하고 뭔가 통하지 않는 이런 강의의 문화는 위의 내용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이 엉망이라서 대부분은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 자체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갭이어 시간을 갖고 펜듈럼에서 잠시 빠져나와 주체를 '나'로 두고 생각해볼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해외여행을 떠나 '아 내가 더 이상 이렇게 살 필요는 없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다. 이렇게 깨어있는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회의적이고, 다양성에 열려있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게 안타까웠다. 이런 점에서 올바른 태도, 그리고 좋은 정보와 교육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내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게 정말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입시에서는 벗어났지만 취업이라는 펜듈럼에 곧바로 휘둘리고 있어 여전히 '왜 당신은 대학에 가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대답을 못한다는 건 갈수록 자신다움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에게 충분한 시행착오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몸을 사리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정말 자신이 먼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명문대는 오히려 나의 색깔을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나와 건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항상 알을 깨고 나오는 주체가 그 무엇도 아닌 '나'임을 잊지 말고, 올바른 태도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