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성 정리>

보통 '학문' 그리고 '논리'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믿음'과 '신뢰'를 부여한다. 그리고 '완전성'이라는 헛된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과 수학이라는 분야에 더욱 완벽함이라는 오해를 갖는데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에 카운트펀치를 가한다. 이는 수학을 포함하여 일반 이론 체계 전체에 적용이 가능하며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낸 이론적 틀과 구조로는 결코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없고, 그것이 또한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



<공리1>

'모든 이론은 증명 불가능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공리를 통해 그것들을 조합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함으로 여러 법칙을 발견하는 기법을 이용. 그러나 1830년경 수학천재 가우스가 5번째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꾸어 넣었다. 이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의 공리가 서로에 반하는 것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자체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또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문의 이론체계는 '절대적 진리의 기술'이 아니다. 어느 일정 공리를 토대로 한 논리적 사고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100년 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공리를 선택하고 모순이 없어 보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자기의 그 틀안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리2>

'A=B, B=C라면 A=C이다.'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니까, 성립된다고!'라는 비논리적인 부분에 의존한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패러독스는 논리조차 공리(암묵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행하는 논리적 사고란, 사실 '증명 불가능한 신념' 중 하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의심하는 어떤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by 데카르트. 근대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논리 1>

논리적 사고에는 반드시 비약과 모순이 있다. a=b : a와 b가 어떤 근거로 똑같다고 간주할까? 애당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가 'a=b이다. 그러니까...~다.'라는 것은 분명히 비약과 모순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논리적 사고의 정체이다.



<모순> 

누군가가 '그것은 모순이다!'라고 말했어도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만들고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도록 공리를 제멋대로 정한 것은 그 자신이니까. 만약 우리가 모순을 마추쳤을 때,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공리의 변경'이다.



<언어게임>

말이란 객관적인 근거에 따라 성립되지 않으며 전통적, 문화적으로 정해진 생활양식이라는 Rule을 근거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비트켄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이 정한 룰 안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하고 있으니까 결국 논리라는 것은 '자작연출'이다. '자작연출'



<이데아론>

'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삼각형'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도구주의>

도움이 되기만 하면 이론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는다.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도움 되는 지식인가 아닌가'이다.





인간은 어떤 기반 위에 사는가?

진실 위에 살아가는 존재일까?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암묵적 공리에 살아가는 존재인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은 우리 인간이 구축한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완전하나 우리 인간이 스펙트럼으로 비추어지고 건설한 사회는 결국 진리가 아닌 Mind로 이룩한 것이다. 고로, '공리'로부터 출발한 이 모든 것은 불완전함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나약함을 직면하라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절대적 상대성에 이해하고 겸허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이 관전 포인트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개념을 공리로부터 도출해내어 완전성의 믿음을 부여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절대적인 삼각형, 완벽하고 완전한 삼각형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보지 못했다. 여기서 본 적이 없음을 인정할 때, 다른 것에도 잡아떼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가 몸에서 우러나온다.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리적이다.'라는 말도 그저 우리가 만들어낸 생각의 방식에 한 약속이며, 일종의 게임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속에 들어있을 엄청난 수의 공리가 서로 얽히고 얽혀 생각의 방식을 규정짓는가.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특성 안에서 놀음하고 있지 않는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아름다움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by T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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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있던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 후기를 수정/보강했습니다.)


학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과 과정에 대해 공부하는 건 학문을 넓고 깊이 파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한다. 학문의 실체를 알아야 환상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 사실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반 대학에서는 이 내용에 대해 접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책의 1장은 대학을 대신해 우리가 기존에 갖은 학문에 대한 환상 또는 오해를 산산히 부시고, 이론이 무엇이고, 학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보게 만든다.


우리의 몸이 처음엔 단 하나의 세포로 시작해서 수많은 분열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모든 학문도 단 하나의 명제에서 시작했다. 학문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명제가 ‘공리’인데, 공리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히 자명한 법칙’을 뜻한다.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데, 자명해 보이므로 공리로 하자고 ‘약속’한 것이다. 학문을 지탱하고 있는 최초의 기둥이 약속이라니! 누가 생각해도 학문의 기둥은 단단하고,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약속만 다시 하면 사과가 배로 불려도 상관없듯이 그 기둥은 실제로는 전혀 단단하지 않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기본 공리를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기하학은 매우 객관적이고, 정교하며 완전한 학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느 학문처럼 기하학을 만든 최초의 공리는 증명되지 않다. 따라서, 만약 공리에 오류가 있다면 기하학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학문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우스가 기존의 평행선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꿔 놓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었다. 이는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지만, 학문 안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모순’도 공리에 의해 존재하는 개념일뿐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관측된다. 상식적으로는 빛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즉 말이 안되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위의 사실이 맞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모순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은 특정한 틀 속에 있을 때만 발견된다. 그리고 그 틀을 받치고 있는 건 약속으로 만들어진 공리이다.


    실재   |   공리   →   논리   →   정리   →   이론   →   학문


빛이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존재한다는 건 실제로 관측된 ‘실재’이다. 하지만 약속은 '실재'를 담아내는 게 아닌 인위적인 무엇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실재'보다 논리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약속으로 이루어진 공리, 그리고 공리로 이루어진 학문은 결국 위의 관측 결과를 담아낼 수 없는데, 바로 이 사실을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학문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의 세상은 진리 위에 기초한 게 아니라, 약속 위에서 세워졌다."


애당초 수학, 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시작을 보면 그 속엔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치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근거로 하나의 세계관이 구축된 것이다.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이다. 뉴턴의 방정식이 왜 그렇게 구성돼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용하게 쓰이기만 한다면 오케이다. 이렇게 학문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문해석학을 사이비 학문이라고 깎아내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이 학문을 공부해도 괜찮을까? 이게 정말 맞는가? 왜 이렇게 된다는 거지? 라는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기존의 관점과 다르고, 기존의 논리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니다. 학문은 그 틀안에서 논리적으로 문제없는 결과들이 도출되기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떠한 학문도 '실재'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기에 특정 학문에 집할 필요도 없다. 자료가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배열되는 게 진실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그 틀 안에서만 진실할 뿐이다. 한쪽의 시각만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걸 증명한다는 건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지고, 자신이 만진 부위만을 코끼리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의 마인드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찾기 애쓴다는 걸 인식하고 마인드적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 우리는 학문을 대할 때, 그저 '도구주의적' 입장을 취하면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되는가, 즉 유용성에 따라 학문을 취할지 버릴지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언어로 인해 구분된 학문의 경계를 알고,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러 학문들을 통합할 수 있고, 거기서 나오는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생소하거나 쉽게 공부하지 못했던 학문도 두려움이나 이질감 없이 접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과 경제학은 나누어진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자도 어디가 경계인지 말할 수 없다. 현재 보이는 경계는 단지 약속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 거기엔 근거가 없다. 이름이 붙여지는데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이론은 다면적인 현실의 특정한 한 측면을 보여줄 뿐이다.


유용성을 얻기 전에, 유용성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성 또한 알아야 한다. 학문할 때, 도움이 되는 부분까지만 취하는 걸 넘어서, 이것만이 맞다고 집착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신념을 형성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편협한 사고는 또한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가둘 수있다. 하지만 이 역시 좁게는 학문이, 넓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실재’에는 약속을 토대로 만들어진 학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널렸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학문이 실용적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게 사실이다.


학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된 건지, 왜 경계가 생겼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학문하는 태도를 갖추게 만든다. 학자적 태도를 갖춘 사람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을 열린 태도로 검토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삶에서 일어나는 '실재'들, 예를 들면 인간관계, 소통, 결혼, 일 등을 경험할 때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학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연구를 통해 굴러가는 이 세상 위에 올바르게 서있을 수 있는 힘이 된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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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학문을 통해 유용성을 얻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애초에 인간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또 서로 인식한 바를 나누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냈다. 즉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앎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해 내가 '안 것’을 설명하고, 의사소통하는 '유용성'을 마음껏 누린 대신 '절대성'이라는 대단한 무언가를 놔버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앎'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지만, 그 '앎'을 100%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언어는 약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엄청난 한계를 가진다. 평소에 쓰는 언어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인다. 특히 학문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언어는, 실제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사전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의 뜻을 찾고, 뜻풀이에 나와 있는 단어를 또 찾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폐쇄적인, 순환하는 원을 만든다. 결국 최초로 정의된 단어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언어인 것이다. 이는 언어가,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해 표현되는 학문, 논리, 인간의 이성 또한 절대적인 것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인간은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사고하지 못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결코 앎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인식론을 발전시켜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건지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생기게 됐다.(물론 이 또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인 언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론의 연구는 '철학'적 사고의 본질이 된다. 그리고 이 인식론이 심층적인 수준에 접어들어 '인간이 사물, 세상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학문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학문을 만들고 공부하게 됐는지 그 시발점을 찾는다면 그 중심엔 인식론을 본질로 한 철학과 과학이 있다. 그래서 학문을 시작하는 시점이 있는 사람이 철학사, 과학사를 공부한다는 건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어떤 책을 읽어도 대부분 철학과 과학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그게 바로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링크 포인트가 된다. 그걸 모르고 그냥 개별적인 지식만 공부한다면 그냥 조각 모음하다 끝날 수 있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 그리고 철학사와 과학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단단한 지적 기반을 쌓을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도 평생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진짜 열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본질, 과학, 철학 어느 것 하나 중요시하지 않는다. 각 분야별 전문가의 무지일 수도 있고(이게 학문의 기반일 거라 생각 못하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행사하려는 정치적인 펜듈럼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결국 단절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단지 학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스스로의 세계에 갇히고, 관계적으로도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다. 과학사, 철학사를 보면 시대가 어떻게 순환하는지 그 원리를 알게 되는데, 이 사실을 깊이 알면 삶을 근시안적으로 살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과학사, 철학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봤는가'와 관련한 수많은 관점들을 알게 된다면 사고가 더 확장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더 열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철학과 과학을 뺀다는 게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삼성, 마이크임팩트, 여러 대학, 방송사 등에서 많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가’하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인문학의 본질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기반이 어떠한지 모르고, 그저 인문학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인문학의 본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풍요롭게 하고, 교양을 쌓는 데에 의의를 둔다면 상관없지만. 이는 내용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모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인간이 단어 하나를 만들고 정의하는 것은 끝없는 지知의 우주를 개척해나가는 것과 같다. 마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캐릭터가 움직여 지도가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가 없으면 사고력의 확장도 없다. 하지만 정의는 왜 그런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약속’의 과정이며, 언어를 통한 사고와 판단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는 말로는 절대, 절대적인 것을 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렇게 자명하게 실존하는 ‘나’가 누군인지도 절대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의식 수준이 1~1000에서 400대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으로, 학문으로, 언어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으면, 머리로 이해가 안되면 존재하지 않으며 거짓인 걸까? 학문은 우리에게 굉장한 유용성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모든 학문은 세상을 한 측면에서만 설명하기에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유용성으로 인해 그 학문만을 맹신하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심판해 결국 고립되는 등의 피해를 볼 수 있다. 학문을 깊이 하기 전, 내가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자각하고,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진짜 지혜를, 올바르고 건강한 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의 시작과 태도의 시작은 같이 간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BU_class 2014. 4. 6. 22:40

사실 인류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에 갖춰야 할 Mindset은 분명 존재한다. Beyond University에서 배우는 것은 바로 이 최소한의 Mindset이라 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최소한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사고방식은 생존과 더불어 균형 있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 요소이다. 21세기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과학이다. 고대과학이 아닌 근대과학(=뉴턴역학)과 현대과학(=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는 사실 인류 지성에 대한 경외심과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학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특히나 과학에서도 엄밀성과 객관성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수를 느끼게 해준다. 뉴턴으로 인해 근대과학이 태동한 과학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과학이란 애초에 형이상학적 질문을 답하기 위한 학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양적 연구를 통해 객관적이고 엄밀하게 탐구할 수 있는 것만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매우 협소해 보이고 소소해 보일지라도 검증된 방식으로 차곡차곡 쌓여 인류 지성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한 발전이 인류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대인이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사와 과학만 아는 것은 절름발이가 될 위험이 있다. 과학을 한 걸음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정말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과학이라는 것에 문제는 없는지? 의문을 던지며 과학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철학은 매우 큰 위상을 갖는다. 과학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분야에 불과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엄밀하고 객관성을 지닌 과학 특히, 근대과학과 현대물리학을 주로 탐구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분야다. 과학철학을 공부하게 되면 놀랍게도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 분야와는 다르게 어떻게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끊임없이 과학과 함께 발전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최근엔 인지혁명 이후 인지과학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과 반대 극단에 있는 종교와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심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심리학은 크게 4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1세대는 정신분석학, 2세대는 행동주의 심리학, 3세대는 인본주의 심리학, 4세대는 자아초월 심리학으로 말이다. 종교와 영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학문으로 자아초월 심리학이 있다. 이 학문은 수많은 철학, 종교,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학문을 통합시켜 영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어떠한 종교적, 영성적 편향을 벗어나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과 영성 사이의 가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철학을 들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철학, 종교와 영성에 대해서는 형이상학 그리고 주체가 객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는 인식론을 들 수 있다. 결국 한 인간이 생각하는 총체적 체계는 하나의 사고 체계를 이루고 이 세상에는 70억이라는 인구수만큼이나 70억의 철학체계가 존재한다. 인류를 이끌어 온 것은 시대적 역사적 흐름과 함께 사상이 지배해 왔기 때문에, 서양 철학사를 통해 인류가 어떠한 사고에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는지를 심도 있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지혁명 이후 모든 학문의 근간에 대해서 새롭게 재조명해야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대학의 인지과학에 대한 미비한 발전을 뒤로하고 주체적으로 인지과학에 대한 지식을 접해야 한다. 학문의 근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인지과학의 영향이 점점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사실 인지과학의 발달로 서양철학 안에서 한 기둥을 담당한 인식론은 그 자체로는 이제 무의미해졌으며 19~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힘을 잃었다. 인지과학의 흐름인 [고전적 인지주의 - 연결주의 - 뇌 - 대니얼 카너만의 휴리스틱스 - 내러티브적 마음 - 체화된 인지] 의 맥락을 전반적으로 이해해 두어야 한다. 

이외에도 카오스, 복잡계, 사회네트워크 이론과 양자정보이론과 같이 과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분야와 미래학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언어, 공리, 논리, 학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로버트 기요사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용인/자영업, 전문가/사업가/투자자의 사분면을 이해함으로써 각 분야의 사람들이 돈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통합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도 결국 이 4분면에서 벗어나 경제적 활동과 사고방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Beyond University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21세기에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 쌓아야 되는 근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곳이고, 각 분야에 대해 스스로 접근하여 교양을 쌓고, 생존과 자아실현에 반드시 필요한 Mindset갖추게 동기부여를 한다. BU멤버는 각자 한국 대학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반드시 알아야 할 Mindset을 갖추어 나가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나가 인생을 완성시키는 삶을 지향한다. 뿌리를 깊고 균형 있게 제대로 잡아주는 교육을 하는 곳이 바로 Beyond University이며 이러한 교육에 있어 한국의 어떤 교육 과정도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by Ocean

posted by BU editor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13471833




1.
과학. 철학. 과학철학.
학문의 경계는 인간이 짓습니다. 절대적인 경계란 있을 수 없죠. 장하석 교수는 과학을 알려면 그것의 바탕이 되는 '과학철학'을 연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과학철학은, 과학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도구와 같습니다.

그리고 장하석 교수는 '인간은 전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과학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한계는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실재를 알 수 없고, 안다고 해서 100% 확신할 수 없기에, 과학이라는 의심의 과정을 통해야만 잠재된 새로운 정보들의 개발을 기대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관찰 방법도 더욱 정교해질 수 있습니다.


2.
과학철학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열려있음'입니다. 과학은 전부에 대해 단언하지 못하고, 절대적으로 옳을 것만 같았던 과학 이론들이 결국 인간의 상상력 위에서 성립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죠. '열려있음', 이 메시지는 무의식적으로 획일화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어떻게 하면 열려있을 수 있을까요? 장하석 교수는 서로 놓아주고, 때로는 격리된 채로 있음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EBS 특별기획]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http://home.ebs.co.kr/sciencephilosophy/main




[프로그램 소개]

과학을 의심하라! '물이 끓는 온도는 100가 맞는가?', '산소는 왜 O2인가?'와 같은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과학지식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 결국, '과학에 정답이란 없다'고 이야기하는 학문이 있다. 바로 '과학철학'이다. 우리에게 아직 낯선 학문인 '과학철학'이 기존의 과학지식을 의심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진정한 과학이란 무엇인가'리는 과학의 근본문제를 묻고자 합니다.


동시에 그동안의 과학이 대개 '진리'란 하나이고, 그 진리를 추구하는 길도 하나로 정해져 있다고 믿어 오는 동안, 다양하게 발전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해 나가려는 노력이다. 이는 비단 과학의 영역에서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양극화 시대에서 다양성의 시대로 성장하는 경계에 있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동력, 그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EBS특별기획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런던대학교와 케임브릿지대학에서 20년간 과학철학 강의를 해온 세계적인 석학 장하석 교수와 함꼐 과학지식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이다.


총 12강으로 구성된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지식의 본질에 대한 일반론부터 과학사, 현대 과학에서 필요로 하는 다원주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과학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분석한다. 더불어, 과학이 문화적, 사회적, 기술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철학과 역사를 통해 찾아보는 흥미진진한 '과학철학'의 세계를 만난다.



posted by BU editor

어떤 이론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었다면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수학계의 거장 힐베르트는 '수학 이론에 모순은 일체 없고 어떤 문제라도 진위의 판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하고자 했지만 괴델이 '수학이론은 불완전하며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수학적으로 증명해 버렸다. 어떤 이론 체계에도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하고,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그 이론 체계 안에서 결코 증명할 수 없으며, 결국 자기 자신으로 완결하는 이론 체계는 구조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이다. 요컨대 수학이론에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포함되어 있고, 수학 이론에서 증명 불가능한 명제를 포함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체계가 옳다고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수학,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일정한 공리를 토대로 논리적으로 짜여 체계화된다. 어떤 이론 체계에도 반드시 처음에 공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하는 암묵적인 이해가 공리의 시작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리를 선택하고 모순이 없어 보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자기 안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선택한 공리가 정말 옳은지 증명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논리라는 것도 암묵적 이해에 의해 성립된다. 이것 또한 증명 불가능한 전제 중의 하나로 본질적으로 공리와 마찬가지이다. 논리도 약속, 공리도 약속이다. 뉴턴의 방정식에서 '중력은 물체 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라는 식을,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도 없는데 물리학의 기초로 삼고 있다. 

또한 '나는 인간이다'라는 얼핏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말조차, 객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 채 그것이 옳다고 하는 전통적, 문화적 룰에 의한 것이다. 어떤 말의 근거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조차 근거 없는 룰을 토대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을 사용해 논리적으로 뭔가를 서술했다고 해도 그 올바름의 근거는 결국 '이건, 이래'라고 정한 것이다. 

결국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이게 설명되었더라도 모든 이론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이론은 없다.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그나마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인가 아닌가.' 뿐이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약속한 것을 배우는 것일 뿐 우리의 논리적 사고로 진리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다. 학문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실용성'에 있다.


by Miranda

posted by BU editor

이론은 무엇이며, 학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학문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써먹는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의 제1장 ‘철학적인 무엇’(p.12~47) 파트는 바로 이 부분을 파헤친다.

우리의 몸이 처음엔 단 하나의 세포로 시작해서 수많은 분열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모든 학문도 단 하나의 명제에서 시작했다. 학문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명제가 ‘공리’인데, 공리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히 자명한 법칙’을 뜻한다.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데 자명해 보이므로 공리로 하자고 ‘약속’한 것이다. 학문을 지탱하고 있는 최초의 기둥이 약속이라니! 누가 생각해도 학문의 기둥은 단단하고,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약속만 다시 하면 사과가 배로 불려도 상관없듯이 그 기둥은 실제로는 전혀 단단하지 않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기본 공리를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다. 기하학은 상식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공리는 증명된 것은 아니기에 만약 공리에 오류가 있다면 기하학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학문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우스가 평행선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꿔 놓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었다. 이는 기존에 있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지만, 어떤 모순도 발생하지 않았다.

‘모순’도 공리에 의해 존재하는 개념일뿐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관측된다. 상식적으로는 빛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즉 말이 안되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위의 사실이 맞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모순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은 특정한 틀 속에 있을 때만 발견된다. 그리고 그 틀을 받치고 있는 건 약속으로 만들어진 공리이다. 

실재 | 공리 → 논리 → 정리 → 이론 → 학문

빛이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존재한다는 건 실제로 관측된 ‘실재’이다. 하지만 약속은 '실재'를 담아내는 게 아닌 인위적인 무엇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실재'보다 언어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약속으로 이루어진 공리, 그리고 공리로 이루어진 학문은 결국 위의 관측 결과를 담아낼 수 없는데, 바로 이 사실을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학문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의 세상은 진리 위에 기초한 게 아니라, 약속 위에서 세워졌다."


이미지. '우주'의 이치-'학문'의 이치(by Paul Park)


애당초 수학, 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시작을 보면 그 속엔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치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이다. 뉴턴의 방정식이 왜 그렇게 구성돼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용하게 쓰이기만 한다면 오케이다. 이렇게 학문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문해석학을 사이비 학문이라고 깎아내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이 학문을 공부해도 괜찮을까? 이게 정말 맞는가? 왜 이렇게 된다는 거지? 라는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면 취하고 아니면 버리면 되기 때문에. 간단하다. 반대로 어떠한 학문도 '실재'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기에 특정 학문에 집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학문을 대할 때, '도구주의적' 입장을 취하면 된다.

더불어 언어로 인해 구분된 학문의 경계를 알고,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러 학문들을 통합할 수 있고, 거기서 나오는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생소하거나 쉽게 공부하지 못했던 학문도 두려움이나 이질감 없이 접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과 경제학은 나누어진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자도 어디가 경계인지 말할 수 없다. 현재 보이는 경계는 단지 약속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 거기엔 근거가 없다. 이름이 붙여지는데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단편적인 사고로 나에게 유용한 지식을 전달하는 학문들을 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유용성을 얻기 전에 유용성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성 또한 알아야 한다. 학문할 때, 도움이 되는 부분까지만 취하는 걸 넘어서, 이것만이 맞다고 집착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신념을 형성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편협한 사고는 또한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가둘 수있다. 하지만 이 역시 좁게는 학문이, 넓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실재’에는 약속을 토대로 만들어진 학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널렸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학문이 실용적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게 사실이다.

위의 내용을 봤을 땐, University라는 이름은 '진리를 밝힌다'라는 뜻이라기보다 '진리에 근접해나간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런 대학은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학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왜 경계가 생겼는지부터 먼저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것이 대학교의 진짜 역할이다. 학문하는 태도 또한 굉장히 중요한데, 위의 내용을 알면 자연스럽게 갖춰질 수 있다. 더불어 학문의 한계를 알려주고, 삶에서 인간관계, 소통, 결혼, 직업 등 '실재'를 경험할 학생들에게 어떤 지혜를 갖춰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학교들은 이런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마인드적으로 건강한 인재가 될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정말로 정보의 힘은 대단하고,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대학에서 기회가 없다면 BU와 같은 프로젝트나, 하다못해 개인적으로라도 위의 내용을 한 번이라도 꼭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이 복잡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된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논리학은 너를 A에서 B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너를 어느 곳이든 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논리는 우리가 불편을 겪지 않으려고 만든 약속일뿐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을 통해서 배우고 알 수 있는 것은 A에서 B같이 약속된 정의, 공리들 위에 세워진 상대적인 개념들뿐이다. 그러나 상상력(수업의 맥락으로 풀면 학문, 언어 등의 체계들의 상대성을 아는 것)은 약속된 개념들을 비판할 수 있는 분별력도 가질 수 있게 해줄뿐더러 공리와 약속에 매여있지 않은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단 한 번도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발견한 적이 없다.


: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과 수업의 맥락에서 볼 때 '이성적인 사고'는 상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와 언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학문을 학습하고 공부할 수는 있겠지만 자명하지 않은 것들,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같은 것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발견할 수 없다.


by Tony 



사물의 본질을 밝혀내야지 자신이 믿는 바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논리학은 너를 A에서 B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너를 어디까지나 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고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내가 나라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데카르트는 중세 시대의 신의 권위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학문체계가 틀릴 수 있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명한 진리를 밝혀낼 수 있는 인식론에 관한 철학을 확립했다.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었고, 이는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이러한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들, 사유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라는 명제는 결국 사유하는 것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공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 명제가 의의를 지니는 것뿐이다. 이러한 숨은 공리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식을 나라는 실체로 받아들여 고통을 받는다. 이는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의 의식 대역에 따르면, 자아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 데카르트는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의심한다는 것을 전제하니, '의심하는 나'라는 실체가 곧 '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의심하는 나'라는 것이 '나'라는 실체와 어떠한 필연성이 있느냐고,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또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너무도 자명해 보이는 삼단논법마저도 비논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루이스 캐럴 패러독스처럼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점을 명백하게 알았다. 자연세계를 관찰해서, 자연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수식으로 하나의 패러다임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으나, 철학자들의 사유 행위는 때때로 자연세계와 무관한 약속된 공리 위의 현학적인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는 데카르트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를 옳게 만들기 위해 논리적 타당성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첫 번째 명언)


물론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반증되지 않은 패러다임이더라도,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증되지 않는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를 모순 없이 설명 가능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하는 경우에도, 결국 학문이라는 것은 언어와 수식이라는 약속된 체계 위에서 자연세계를 묘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물리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의 위험성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뉴턴 역학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시공간의 절대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지 못 했다. (이는 특수상대성이론은 순전히 아인슈타인의 머리에서 나왔기에 참고문헌이 없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뉴턴 역학이라는 것도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공리 위에 반증되지 않은 패러다임에 불과했지만, 반증되지 않는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계관은 자신도 모르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이다.


언어, 수식의 절대성, 공리의 절대성, 시공간의 절대성. 이는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결코 자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논리가 아닌, 상상력을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자연세계(실재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들 언어, 수식, 공리, 기존의 패러다임에 자유로운 상상력 말이다. (두 번째 명언)


by Ocean 

posted by BU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