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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8 나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
- 2014.06.05 '의식 수준을 넘어서' 2부 '선형적 마음' 후기 by illy
- 2014.04.23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 제 1장. '철학적인 무엇' Review
- 2014.04.06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2014.04.06 인간은 학문으로, 이성으로, 언어로 절대! 절대적인 것을 알 수 없다.
- 2014.04.06 왜 '뭔가 하나를 건드려서' 무너져보면 안 되는 것인가?
- 2014.04.06 인간의 '언어'가 폐쇄적인 원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2014.04.06 켄 윌버ken wilber, '존재의 대사슬'
글
나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학문의 원리, p.16-39)
'학문'이라는 것은 '무'에서 세워지지 않는다. '공리'에서 출발한다. '공리'를 토대로 어떤 사실들이 '논리적'으로 차곡차곡 정리되고 쌓여 형성된 것이 학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공부해 왔다. 하지만 이 공리가 '참'인가, '진실'인가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보려는 시도는 허락되지도 않는다.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하거나, '자명한' 공리에 대해 '왜 그런가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은 이상하다거나 바보로 취급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학자들은 처음엔 그런 이상한 바보들이었다.
너무도 자명하다고 여겨져서 이를 '왜 그런데?'라고 물어보면 바보 취급을 당할 수도 있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위대한 수학자 '가우스'가 뒤집고 새로운 공리를 세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 가우스에 의해 뒤집어지긴 했지만, 유클리드 역시 기존의 공리를 뒤엎어서 수학이라는 학문을 더 넓힌 사람이다. 그 위대하다는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고집을 부리며 무시하고 경멸하기까지 했던 '무리수'의 존재를 보란 듯이 증명해내었는데, '혼란의 수'인 무리수는 원주율 '파이'처럼, 자연의 미묘한 법칙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공리'라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고 여겨져서 증명되지 않은 어떤 법칙, 약속이다. 어떤 위대한 권위자가 '이건 이렇다고 해!'라고 우기면 그것이 공리가 되기도 한다. '논리적'이라는 말조차도 차근차근, 바보가 되어 따져 보면 그냥 "일단 이렇다고 해두자"라는 약속일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논리적이지 않은 '모순'도 사실은 그냥 '이런 건 모순이라고 하자'라는 약속이다. '공리'도, '논리적이다'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그 실체는 없다. 각 공리를 보고 우리가 만들어낸 관념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계'에만 둥둥 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문'이라는 것은 그냥 학자들이 약속한 것일 뿐이라는데, 그것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그렇다면 왜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과 정리가 등장하고, 우리는 왜 그것을 공부하는 것인가. 뭘 어쩌라는 말인가! 학문체계로 절대적인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데 다른 동물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먹고 자는 것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리'라는 토대 위에 '논리적'으로 차곡차곡 세워진 증명들이 정말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공리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유연해져도 된다는, 자유를 가져도 된다는 따뜻한 말이다. 새로운 공리가 만들어졌어도,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자체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기하학을 이용해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을 좀 더 가까이 설명하는 학문이 되는 것이다.
학문의 구조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아주 근본적으로, '언어'로 이루어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도 있다. '언어'는 본래 인간이 더 '잘' 살아남기 위한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본질은 없어지지 않는다. 학문도 본질적으로는 더 잘 살기 위한 도구이다. 우리가 이동 수단으로 당연하게 사용하는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자동차는 처음에, 더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여 발명되었다. 그리고 더 넒은 세상을 보기 위해, 바다와 강을 건너기 위해 '배'가 만들어졌고, 더 멀리, 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비행기'가 만들어졌다. 이동 수단으로 자동차'만' 있다고 알고 있거나, 자동차가 '이동 수단'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세상은 거기가 끝이다. '이동수단'으로 비행기'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것 자체로도, 더 넓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자유로움을 느끼지 않는가.
우리는 '제대로' 공부함으로써 '한층 더 넒은' 시각을 갖게 되는 이로움을 얻게 된다. 학문은 세상을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해, 더 깊고 넓은 세상을 살기 위해, 내 의사나 생각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 위해, 또 다른 학문을 얼마든지 공부해볼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질 수 있다. 각 학문의 원리를 알고 있다면, 특정한 틀 안에서 우쭐대는 것을 멈출 수도 있고, 그 안에서 헤매며 불평 불만만 늘어놓으며 앉아있지 않아도 되며, 필요에 따라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새로운 공리를 세워볼 수도 있다. 그게 우리가 공부해야 할 이유다. 더 '잘' 살기 위해 말이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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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의식 수준을 넘어서'에는 각 의식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 감정적 특징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각 의식 수준의 한계점들, 의식 수준 상승을 위한 태도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있었다.
1. 그 '태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낮은 마음과 대비되는 높은 마음의 세상에서 세상은 전혀 다르게 경험되고 보인다."
"과거에 악마화되었던 것은 이제 '악천후와 해일' 같은 것으로, 혹은 미워해야 할 것이 아닌 '계산에 넣어야 할 자연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낮은 마음의 태도와 높은 마음의 태도의 비교로, 하나의 세상에 대한 다른 인식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 주었다. 높은 마음일 때의 태도는 '강한' 느낌이 든다. 강함과 약함은 그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강해진다는 것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어지는 상태, '뒤'가 깨끗한 '용기'이다. 용기를 낼 때 정직해지고 수용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2. 각 의식 수준의 한계
특정 의식 수준을 초월할 때 넘어야 할 한계는 그 의식 수준에서 '붙잡고 있는 무언가'다. 더 높은 의식 수준으로 도약할 때의 장애는 그 한계에 매달린 결과인 것이다. 도약을 위한 태도는 붙잡고 있는 그것을 '놓는 것', '내맡기는 것,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통일된다. 이러한 태도를 보조하는 것은 깊은 '자발적' 겸손함이다. (이때의 겸손함은 '겸손한 척'과 다르다.)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것, '패러다임 맹목'에서 재맥락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루어진 언어, 학문으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라는 학문의 한계를 각 학문들의 의식 수준이 400대에 머무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500 이상인 '사랑'의 수준, 영적인 수준으로 넘어갈 때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가 '선형적'에서 '비선형적'이 된다. 비선형적인 영적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선형적'인 '인간의 이성, 학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400대 의식 수준에서 얻은 '지성'이 한계가 되느냐, 또 한 번의 도약, 영적 실상의 이해에 이르는 발판이 되느냐 하는 것은 다시 겸손하게 수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3. 500대의 의식수준
"사랑은 가슴에서 흘러나온다." 정말 많이 듣던 흔한 말인데, '헛말이 아니구나' 한다. 더 이상 머리(이성)로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맥락의 엄청난 확장이 다시 한 번 일어난다. 500대의 의식 수준에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예전에 이게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던 사랑과는 달랐다. 낭만, 정열, '미친듯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낮은 의식 수준의 감정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지며, 과장되고, 일시적인 감정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분별력이 더 상승되며 평온한 상태이고 기쁨의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 안에서는 감정적 싸움도, 상실의 괴로움도, 서로 간의 기대도 없다는 것. '사랑'의 의식 수준을 설명하는 글을 읽을 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설명 자체에도 사랑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이 수준에서 또 한 번 넘어야 하는 한계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편애'를 벗어나는 것, 정말이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살인자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 자발적 용서, 자발적 겸손함이 또 한 번 넘어야 될 산이다.
4. 그 외 생각들
예전에 그런 느낌을 받고 울었던 적이 있다. 내가 짐을 한가득 매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버겁고 힘들면서도 그 짐을 놓아버리는 데에 대한 두려움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자유롭고 싶은데 이 짐들을 어떻게 놓을 줄 몰라 마구 울었던 적이 있다. 그 무거운 짐이 뭔지 몰라서 그랬던지도. 의식 수준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내가 겪었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용기를 내서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고, 모든 걸 수용하는 것이 답이었다.
"마음이 침묵에 든 채 주변과 더불어 그냥 '있게' 해 주면 안도가 찾아든다. 그 결과 평화가 깃들고, 감상과 평온이 우세해진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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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불완전성 정리>
보통 '학문' 그리고 '논리'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믿음'과 '신뢰'를 부여한다. 그리고 '완전성'이라는 헛된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과 수학이라는 분야에 더욱 완벽함이라는 오해를 갖는데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에 카운트펀치를 가한다. 이는 수학을 포함하여 일반 이론 체계 전체에 적용이 가능하며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낸 이론적 틀과 구조로는 결코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없고, 그것이 또한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
<공리1>
'모든 이론은 증명 불가능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공리를 통해 그것들을 조합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함으로 여러 법칙을 발견하는 기법을 이용. 그러나 1830년경 수학천재 가우스가 5번째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꾸어 넣었다. 이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의 공리가 서로에 반하는 것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자체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또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학문의 이론체계는 '절대적 진리의 기술'이 아니다. 어느 일정 공리를 토대로 한 논리적 사고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100년 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공리를 선택하고 모순이 없어 보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자기의 그 틀안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리2>
'A=B, B=C라면 A=C이다.'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니까, 성립된다고!'라는 비논리적인 부분에 의존한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패러독스는 논리조차 공리(암묵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행하는 논리적 사고란, 사실 '증명 불가능한 신념' 중 하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의심하는 어떤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by 데카르트. 근대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논리 1>
논리적 사고에는 반드시 비약과 모순이 있다. a=b : a와 b가 어떤 근거로 똑같다고 간주할까? 애당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가 'a=b이다. 그러니까...~다.'라는 것은 분명히 비약과 모순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논리적 사고의 정체이다.
<모순>
누군가가 '그것은 모순이다!'라고 말했어도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만들고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도록 공리를 제멋대로 정한 것은 그 자신이니까. 만약 우리가 모순을 마추쳤을 때,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공리의 변경'이다.
<언어게임>
말이란 객관적인 근거에 따라 성립되지 않으며 전통적, 문화적으로 정해진 생활양식이라는 Rule을 근거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비트켄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이 정한 룰 안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하고 있으니까 결국 논리라는 것은 '자작연출'이다. '자작연출'
<이데아론>
'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삼각형'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도구주의>
도움이 되기만 하면 이론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는다.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도움 되는 지식인가 아닌가'이다.
인간은 어떤 기반 위에 사는가?
진실 위에 살아가는 존재일까?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암묵적 공리에 살아가는 존재인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은 우리 인간이 구축한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완전하나 우리 인간이 스펙트럼으로 비추어지고 건설한 사회는 결국 진리가 아닌 Mind로 이룩한 것이다. 고로, '공리'로부터 출발한 이 모든 것은 불완전함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나약함을 직면하라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절대적 상대성에 이해하고 겸허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이 관전 포인트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개념을 공리로부터 도출해내어 완전성의 믿음을 부여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절대적인 삼각형, 완벽하고 완전한 삼각형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보지 못했다. 여기서 본 적이 없음을 인정할 때, 다른 것에도 잡아떼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가 몸에서 우러나온다.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리적이다.'라는 말도 그저 우리가 만들어낸 생각의 방식에 한 약속이며, 일종의 게임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속에 들어있을 엄청난 수의 공리가 서로 얽히고 얽혀 생각의 방식을 규정짓는가.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특성 안에서 놀음하고 있지 않는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아름다움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by T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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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자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그렇다면 '구속'은 무엇인가?
"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함."
자유를 설명하려면 구속이 필요하고 구속을 설명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며, 그래서 언어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中, 장하준」
"1819년 아동노동을 규제하기 위해, ... 아홉 살 미만의 아동들의 경우 고용을 금지한다는 법안이다. .... 많은 사람들이 이 법안이 신성한 계약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자유 시장의 기반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나 공장 매연에 대한 환경 규제에 반대했다.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환경규제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 이렇게 똑같은 시장을 놓고서도 각자 입장에 따라 느끼는 자유의 정도가 다른 마당에, 그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자유시장처럼 보이는 시장이 있다면 이는 단지 그 시장을 지탱하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규제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자유시장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시장이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암묵적, 혹은 공식적인 규제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자본주의 시대에 생기는 갖가지 크고 작은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대안을 생각해보는 데에 있어서 '더' 자유로워질 뿐이다. 번지점프를 할 때 자신을 매고 있는 줄이 튼튼한지 확인을 하고 또 해야 뛰어내리는 데에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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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인간은 학문을 통해 유용성을 얻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애초에 인간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또 서로 인식한 바를 나누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냈다. 즉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앎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해 내가 '안 것’을 설명하고, 의사소통하는 '유용성'을 마음껏 누린 대신 '절대성'이라는 대단한 무언가를 놔버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앎'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지만, 그 '앎'을 100%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언어는 약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엄청난 한계를 가진다. 평소에 쓰는 언어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인다. 특히 학문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언어는, 실제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사전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의 뜻을 찾고, 뜻풀이에 나와 있는 단어를 또 찾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폐쇄적인, 순환하는 원을 만든다. 결국 최초로 정의된 단어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언어인 것이다. 이는 언어가,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해 표현되는 학문, 논리, 인간의 이성 또한 절대적인 것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인간은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사고하지 못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결코 앎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인식론을 발전시켜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건지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생기게 됐다.(물론 이 또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인 언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론의 연구는 '철학'적 사고의 본질이 된다. 그리고 이 인식론이 심층적인 수준에 접어들어 '인간이 사물, 세상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학문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학문을 만들고 공부하게 됐는지 그 시발점을 찾는다면 그 중심엔 인식론을 본질로 한 철학과 과학이 있다. 그래서 학문을 시작하는 시점이 있는 사람이 철학사, 과학사를 공부한다는 건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어떤 책을 읽어도 대부분 철학과 과학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그게 바로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링크 포인트가 된다. 그걸 모르고 그냥 개별적인 지식만 공부한다면 그냥 조각 모음하다 끝날 수 있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 그리고 철학사와 과학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단단한 지적 기반을 쌓을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도 평생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진짜 열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본질, 과학, 철학 어느 것 하나 중요시하지 않는다. 각 분야별 전문가의 무지일 수도 있고(이게 학문의 기반일 거라 생각 못하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행사하려는 정치적인 펜듈럼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결국 단절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단지 학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스스로의 세계에 갇히고, 관계적으로도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다. 과학사, 철학사를 보면 시대가 어떻게 순환하는지 그 원리를 알게 되는데, 이 사실을 깊이 알면 삶을 근시안적으로 살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과학사, 철학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봤는가'와 관련한 수많은 관점들을 알게 된다면 사고가 더 확장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더 열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철학과 과학을 뺀다는 게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삼성, 마이크임팩트, 여러 대학, 방송사 등에서 많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가’하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인문학의 본질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기반이 어떠한지 모르고, 그저 인문학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인문학의 본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풍요롭게 하고, 교양을 쌓는 데에 의의를 둔다면 상관없지만. 이는 내용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모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인간이 단어 하나를 만들고 정의하는 것은 끝없는 지知의 우주를 개척해나가는 것과 같다. 마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캐릭터가 움직여 지도가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가 없으면 사고력의 확장도 없다. 하지만 정의는 왜 그런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약속’의 과정이며, 언어를 통한 사고와 판단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는 말로는 절대, 절대적인 것을 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렇게 자명하게 실존하는 ‘나’가 누군인지도 절대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의식 수준이 1~1000에서 400대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으로, 학문으로, 언어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으면, 머리로 이해가 안되면 존재하지 않으며 거짓인 걸까? 학문은 우리에게 굉장한 유용성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모든 학문은 세상을 한 측면에서만 설명하기에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유용성으로 인해 그 학문만을 맹신하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심판해 결국 고립되는 등의 피해를 볼 수 있다. 학문을 깊이 하기 전, 내가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자각하고,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진짜 지혜를, 올바르고 건강한 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의 시작과 태도의 시작은 같이 간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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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재미가 없었고, 그 재미없는 공부를 '피상적' 혹은 '전략적'으로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도 가고 직장도 다닌다. 여전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기반 위에 쌓여만 가는 지식 아닌 지식으로 억지로 공부하고, 외우고, 시험보고 합격하고 잊어버리고 단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억지로 일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산다. '뭔가를 하나만 건드리면' 무너질게 뻔한데 그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 힘들게 힘들게 포장하고 또 포장해서 점점 자기가 만든 틀안에 갇혀 평생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뭔가 하나를 건드려서' 무너져보면 안 되는 것인가? 뭐가 두려워서 무너져보지 못하는 것인가? 왜 힘들게 힘들게 꽁꽁 감싸야만 하는 것인가?!
특정 단어에 대한 국어사전을 찾고 그 안의 단어를 찾고 또 찾다 보면 결국 처음 시작했던 그 단어로 돌아온다고 한다. 몇 단어만 찾고 찾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실체는 없고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의존적'인 관계로 버티고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상대적으로 설명이 될 뿐이며, 절대적인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이성, 언어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뭔가 하나를 건드린다는 것'으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제까지 위태위태하게 쌓여있던 지식들과, 내가 경험했다고 말하는 일들, 내 생각이라 말하는 것들, 각 학분분야의 이론들, 과학 실험들, 권위 있다, 최고다 하는 사람들의 말들, 책들,,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그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무너지는 게 무엇인가? 본래 절대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져서 산산조각 날 것도 없다. 그저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 모두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그것들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허무함과 그와 동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속에서 모든 이론을 세우고 있었던 기하학, 가우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뒤집어엎었는데도 아무것도 무너진 것은 없었다. 그래, 이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언어로 표현된 학문, 이론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공부를 해야하는가? 언어는 절대로 진짜베기를 표현해 낼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글을 읽고 써야하는가? 하는 난관에 부닥쳤다.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냥 손 놓고 밥이나 먹으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무리 공부해도 진리를 알 수 없을 텐데 뭐 하러 공부를 해야 하는가? 그런데 뭐, 재밌는걸 어쩌겠는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찾아보지 않고는 못베기겠는데, 찾고 공부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래서 공부는 안 하겠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그거 잘 됐네~! 한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하면 그만이다. 그저, 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해 엄청 열심히 공부해서 죄다 이해해 놓고 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안 좋아서 이런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긴 안다^^;), 다른 이론이 나타나 이 이론을 뒤집어 버렸을 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생길 뿐이다. (내가 완전 천재여야만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구축되어 있는 이론이 영 아닌것 같을 때, 아주 만약에, 내가 뒤집을 수 있을 때 무서워하지 않고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진리요, 나를 따르라' 하는 권위자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아주아주 조금 생길 뿐이다! (사실 아직 다 무서운 건 마찬가지긴 하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고 뒤집어질 때도 마땅히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게 가장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나만의 세상이 무너질 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발전의 길로 가는 가장 큰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BU멤버가 되면서부터, 공부하는 것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 나는 원래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타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혼자 타과 수업을 신청해 들었고, 그 과목들은 성적이 바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생명과 수업이라도 교수가 내는 과제가 엉터리면 남들 밤새면서 열두장씩 써내는 과제도 나는 수업 시작 15분 전에 달랑 세장 써내서 최하점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생물학도이니 여기에 집중해야만 하고, 공부를 할 거면 평생 생물학 공부만 해야 된다고 주입이 됐다. 남들은 전공 학점 채우고 성적 맞춘다고 재이수하고 점수 따기 쉬운 과목들을 열심히 찾아 듣고 있고, 취직을 하기 위한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난 내가 뒤처지고 있는 줄 알았다. 뭔가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의 공부는 더 이상 파낼 것도 없고 더 파낼 힘도 없는데,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그저 일상이 좌절이고 지침 그 차제였다. 그래서 더더욱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가 싫어졌다! 그런데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무엇이든 내가 생물학과를 나왔든, 아님 그냥 직장인이든, 아직 대학을 안 갔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세상에는 더 알고 싶고 재미있는 공부할 거리가 아주아주 많으며, 그걸 공부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된다는 걸 BU에서 점점 깨달아가고 있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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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U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BU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BU는 21.5세기를 위한 '창조적 지식'을 위한 곳이다. BU는 진짜 공부의 줄기를 잡아준다. BU는 그러나 양적인 공부는 해주지 않는다. 이는 각 개인의 몫이므로. BU가 실현하는 공부 방식은 이러하다. '양과 질'을 동시에 흡수하는, 추구하는 방식. 그것과 더불어 일정한 기간 동안 '음미'를 해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내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최고의 공부'라는 책에서 켄 베인이 말하듯 공부는 '태도'에서 많은 것이 좌우된다. 그리고 그 '올바른 태도'는 자신의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진정성 있게 선택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자기 스스로 진솔하게 의도하는 '공부', '지식'이 아니면 이미 양과 질, 음미, 응용... 이런 것들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진정성 있는 學의 길로 인도하고 스스로 존립 가능케 하는 참 사부師父로서의 학교다. 물론 사부師父도 있다.(Mr.Paul) 그러한 점에서 BU의 공부는 나에게 진짜 공부를 가르쳐줄 유용한 배움터이다. 양과 질, 음미... 아직은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조건화되어온 공부Style은 '결과'가 목적이 되는 '학점'이 목적이 되는 '등급'이 목적이 되는 그런 껍질을 핥는 식이었으므로.
물론 '결과'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16-23절 말씀 묵상] 이러한 구절이 있듯(난 종교가 없지만) 일의 결과는 언제나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조건화된 더러운 공부법은 내게 허술한 열매만을 안겨줄 것이니. BU는 내 인생의 참 열매를 맺는 그러한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그 방법은 내가 해온 습으로 인해 더 힘들 수도 있다. 농약 범벅 농사법보다는 건강한 유기농 농사법이 더욱 많은 땀을 요하듯 처음엔 더 늦어 보일 수 있다. 더 피곤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에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1세기는 창조적 지식사회이다. 『창조적 지식사회』
그러면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실체』, 『지식의 본질』
당연한 말이었지만 충격적이었다. 21세기 창조적 지식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지식'의 本에 대해 알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불패이듯, 나를 알고 지식의 실체와 본질을 알아야만 배움에 능하게 된다. BU는 나에게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다.
2. 인간의 '언어' 가 폐쇄적인 원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Mind로 정의한 공리에서 탄생한다. 개를 개라고 하고, 고양이를 고양이라 하는 Mind의 정의 + 공리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돌고 돈다. 대백과 사전의 두께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국어사전을 보라.
A를 설명하려면 B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C를 설명하려면 D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
Z를 설명하려면 A라는 어휘가 필요하다.
단편적으로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보았다. 즉, 언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A와 Z라는 언어는 현상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그들 간에 배타적으로 보인다 하여도 결국 돌고 돌아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진실은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언어는 예외 없이 상대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언어'라는 것은 '맥락'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존재다.
자,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녀석으로 기술되고 정리되는 '개념槪念'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것인가? 이쯤 되면 계산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절대적으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개념은 없다. 개념은 인간의 Mind로 공리화한 언어 텃밭과 논리 속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 또한 언어와 같이 절대적일 수 없는 놈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에 대해서도 다시 볼까.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언어와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개념이 '학문'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학문'은 예외 없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Mind로 정의한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적인 진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 이것이 이 학문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학문은 우리 인류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다. 무엇의 목적으로? '실용성' , 이것이 학문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성과 언어, 논리로 기술되는 학문은 그저 삶의 유익한 Skill, Practical Solution을 주는 역할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학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자의적으로 돈과 관련하여 구분 지을 수는 있으나 엄연히 다른 말이다. 그리고 옳지 못한 표현이다. 세상의 '학문學問'은 실용성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이상의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순 없다.
그럼 여기까지의 맥락에서 다시 '언어'의 포인트로 돌아오자면, 인간의 언어는 실용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특히, 학자라면 자신의 영향력만큼 언어의 사용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언어가 실용적일수록 그만큼 위험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문을 다루고 그 속에서 유익을 맛보는 인류는 한편으론 학문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WHY? 학문은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학문을 한다고 하면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밝혀 줄 것이란 희망 속에 산다. 그리고 그런 생각 속에 다른 것들을 도외시하고 잘 돌아보지 않게 된다. 내가 하는, 내가 주장하는, 내가 믿고 있는 이 개념, 학문은 절대적이니까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기서 적지 않은 위험요소들이 그 자신을 거꾸로 고립시키기도 한다. 많이 공부할수록 똑똑해지지만, 동시에 여러 위험도 생겨난다.
인간의 'Mind'와 '학문學問'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화두를 던지는가?
수 많은 학문을 접하게 되고 실용성을 이끌어 내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함을 인지하여 즉 '내려놓음下心'으로 절대성을 내려놓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태도Attitude'로부터 비롯되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므로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케 하려면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받아들이게 되면 지식의 본질, 실체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 가능하다. 지식을 학學하기 전에 지식의 본질, 실체를 알아야 실용성에 대한 유의미하고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이는 '절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공부의 첫 순서, 첫 단추다.
by T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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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리는 '과학'과 '종교'라는 2가지 거대한 펜듈럼 속에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망각하고 있거나,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탁월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결코 피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직면해야 할 커다란 과제다.
인간 본성과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이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한 사유다. 그러나, 우리가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선 이성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필연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는 곳이 바로 종교의 영역이다. 문제는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이 없이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도(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 종교적 체험이 진행 중이지 않는 상태라면) 결국 언어적 사유, 이성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무엇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종교적 한계와는 달리, 과학은 반복할 수 있는 실험적 검증과 반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리학이란 좁은 의미에서의 과학은 물질 영역 하에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검증된 지식의 총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대상만을 다루는 영역을 탈피하여, 과학이란 것이 실험적 검증 가능성과 반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는 체계라고 정의한다면 인문과학, 사회과학과 같이 비감각적, 비경험적, 비물질적, 형이상학적인 영역까지도 과학이라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다시 돌아가서, 종교 영역 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논증되고 반증 가능성이 열려있으면 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다. 에릭 샤프(종교학자)는 종교 현상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실험 대상자들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험적 통제가 상대적으로 쉬운 심리학 분야에 비할 경우 발전이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사실상 이 분야의 발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윌버는 명상과 요가에 관한 동양의 경전과 묵상, 내적 기도에 관한 서양의 경전 안에는 어떤 규칙과 실험 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올바르게 따른다면 존재의 대사슬의 4,5단계의 연구 영역인 영혼(soul)과 정신(spirit)을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험적 검증은 통제에 따른 훈련받은 명상가를 통해서 입증 혹은 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존재론적 도식을 수용한다면, 더 이상 물리학과 신학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하위 영역의 학문을 하는 것에 상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상위 영역의 학문을 하는 것에 하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심리학, 생물학, 물리학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학과 물리학의 논쟁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신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어떤 신학자들은 활자 근본주의적(= 성경 근본주의) 관점에서 검증된 과학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또한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교인을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생물학자들은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영역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미지. 존재의 대사슬
이미지 출처 _ http://bridgeacrossconsciousness.net/wiki/index.cfm?ssid=100608
이를 통해 4가지 큰 자각을 할 수 있었다.
첫째, 현대 물리학(상대성이론, 양자물리학)과 신비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유의해야 겠다는 생각을 통해 자기계발, 영성관련 서적에서 범하는 현대 물리학에 대한 잘못된 인용을 파악하는 힘이 조금이라도 생긴 것.
둘째, 신비주의라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위영역에 내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통해, 신비주의, 깨달음, 종교적 경험 등만이 옳은 길이며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라는 생각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 것.
셋째, 종교적 체험 영역 또한 과학적 검증 가능한 길이 존재하므로 분별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
넷째, 학문 간의 위계관계를 통해, 쓸모없는 논쟁과 에너지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게 된 점.
cf. 영혼(soul)과 정신(spirit)은 켄 윌버가 독자적으로 재정의했으므로 유의할 것
by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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