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그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한 집념으로 여러 학문들을 만들어내고, 발전시켜서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다. 하지만 불완전성 정리와 같은 이론들과 뇌 과학, 양자물리학, 양자정보이론 등 첨단 과학 이론을 통해 그 시도에는 절대적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한계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이 어떤 틀(한계)을 가지고 우주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였는지,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그 속에서 학문의 경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해, 오히려 학문은 한계적으로 허용된 틀 안에서 최대치를 활용함으로써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이 어떤 학문의 모든 내용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자신만의 사고의 틀'을 인식하고, 발전시켜 학문의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틀에 최대한 가깝게 사고의 틀을 확장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학문 속에서 자신의 인식 틀이 지닌 한계점을 알고, 이 속에 담은 내용들이 무엇이고, 담지 못한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것, 이것이 곧 학문을 공부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언가를 학습함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메타인지적인 눈을 갖게 되어 구조적이고, 통합적이며 효율적인 접근이 가능해진다.


어떤 꼭지점이든 세 개만 찍으면 인식의 틀을 우선 형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 시작이 되는 꼭지점들을 세계적으로,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인증된 책을 통해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 학문을 보다 원리적으로 구조적으로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으로 삼각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석학들의 사고를 그대로 흡수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기에 다른 책과 지식을 더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더한다면 삼각형을 독창적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도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를 볼 수 있는 사고력을 조금씩 기를 수 있다. 결국은 고등학문을 자기 힘으로 학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식 틀'을 갖추는 것의 가장 큰 강점이다.


현재 우리는 BU수업과 팟캐스트를 통해 '학문의 원리와 구조'에 대한 삼각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선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불완전성 정리 이론', '양자 물리학 주요 내용' 등이 주요 꼭지점을 이뤄 첫 삼각형을 형성했고, 그 안에


* 모든 학문은 공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절대로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
* 모든 학문은 다면적인 세계의 한 측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 도구주의적 관점으로 학문을 볼 필요가 있다.


등의 매우 가치있고, 힘 있는 정보를 담아낼 수 있었다. 여기에 양자정보이론이나 주역과 같은 학문을 더해 삼각형을 넓혀간다면 학문의 원리와 구조를 바라보는 시야가 더 넓고 깊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 삼각형이 불완전하게나마 우선 장착되고 나니, 다른 책을 읽으면서, 지식 검색을 하면서,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이 나오면 자연스레 바로 발견이 됐고, 이를 삼각형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게 됐다. 이 경험을 통해, 공부와 삶에 있어서 좋은 맥락을 가지고 삼각형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크게 느꼈다.리고, 이렇게 학문 자체의 본성에 대한 것부터 삼각형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앞으로 접할 학문들이 매우 고맥락적이고, 압축적이고, 컨텍스트를 통해 접근하지 못하면 그저 조각 모음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 공부할 때부터 이 작업에 신경써야 한다는 것 또한 느꼈다. 이것이 사람이들이 학문에 더 접근하기 힘들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 뿐만 아니라 앞으로 '철학사', '과학사'에 대해서도 세계적인 석학들의 책을 통해서 틀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패션의 역사를 깊이 공부하고, 그 흐름에서 영감을 얻고,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선 '인간이 그동안 어떤 사고를 해왔는지'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과 과학의 역사를 훑어야 하고, 이걸 인식 틀의 토대로 만들어 많은 지식들을 연결하는 링크 포인트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사고가 순환해왔는지 그 구조를 알고, 수많은 관점들을 접해 사고 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마도 BU수업에서 학문의 원리와 구조에 대한 학습이 끝나면 이 작업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학문하기 전 사고의 틀을 잡고 이를 인식하며 확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수업을 통해, 그리고 실제로 그 작업을 해보면서 정말 크게 실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존의 교육 기관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왜 '당연하게' 가르쳐주지 않을까, 그리고 심지어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왜 뺏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치 코끼리의 전체적인 모습을 익히는 것이 삼각형 틀을 잡는 것이라고 보면, 다른 내용, 예를 들어 강아지를 처음 접했을 때 자연스레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고 하며, '네 발로 다닌다.', '꼬리가 있다' 그리고 '온몸에 털이 있고, 없다' 등 공통점과 차별점을 빠르게 인지하고, 또 그런 데이터가 쌓일수록 더 크게 분류할 수 있고, 특정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을 하게 되는데, 코끼리의 다리만 보여주고, 강아지의 귀만 보여주는 식의 학습은 그저 단순한 암기 거리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스레 사고력이 늘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며, 학습에 대한 흥미 또한 떨어지게 된다.


책 '생각 기술'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공부가 가정을 증명하는 방법일 뿐이고, 어떤 이론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학생들에게서 숨길 필요가 없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일찌감치 위대한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학자, 수학자 등의 이론을 직접 읽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 이론을 비평하고 자기의 이론을 써나가도록 지도했다. 그 결과 이 당시의 어린이들은 지금의 어린이들보다 놀랄 만큼 방대한 지식을 가졌으며 벌써 10대 중반에 자기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개발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20대가 되면 당당한 학자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스터 폴이 항상 강조하는 대로 나이 상관없이 제대로된 절차와 방법, 그리고 올바른 태도를 통해 학습한다면 누구나 고등학문을 익힐 수 있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학문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은채 고등학문을 철옹성으로 보게 만들고 있다. 이점은 언젠가 꼭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뇌 과학에 따르면 20대까지 뇌의 가역성이 풍부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뇌에 감수성기라는 게 있는데 이 시기에 뇌에 어떤 입력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기능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나갈지 결정된다. 우리는 이때 고등학문을 올바르게 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 학습이 가능하도록 균형 잡힌 인식의 틀을 만드는 작업를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최소 3년을 내다보고 말이다. 공부의 '공工'은 '장인 공'자이다. 장인처럼 열심히 틀을 만드는 것!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진 지금! 제대로 공부해서 평생학습할 기반을 닦아놓아야 한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 미시세계의 대상을 기술할 때 그것을 입자로 바라보기를 택한다면, 우리는 정명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최초로 만들어냈던 것과 같은 원자 모형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모형에서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전자들이 원자핵 주위를 돈다. 만일 그것을 파동으로 바라보기를 택한다면, 원자는 물감이 번진 점처럼 보일 것이다. 이 두 모형은 각각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면서 현실이 취하는 각기 다른 측면들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자기가 선택한 것을 얻는다. 



| 기본적으로 현실 속의 어떤 현상도 기준점이 되어서 하나의 지식체계를 이루어낼 수 있고, 현상계 속에서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점하고 자신의 역할을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늘 애써왔다. 그들은 사물의 특정한 성질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이루고자 했다. 어떤 특정한 자연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많은 과학지식이 얻어졌다. 그리하여 지식의 여러분야가 생겨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분야들은 종종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 우주의 본질은 하나이며 나누어져 있지 않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 한 측면을 제대로 연구하고 해명하기도 전에 이전 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현실의 다양한 측면들을 통합시켜보려고 애쓰지만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과학지식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조화시켜줄 수 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 우리의 현실이 취할 수 있는 모습의 엄청난 다양상 말이다. 이 비길 데 없이 무한한 가능태야말로 우리 우주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본성이다.



- '리얼리티 트랜서핑' 가능태 모델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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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지만 거대한 양자(quantum)의 세계

BU_class 2014. 6. 20. 10:30

팟캐스트 '과학이 빛나는 밤에' 양자물리학 혁명 1~6편 후기 

애매모호한데 거대한 양자(quantum)의 세계 - '이해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양자물리학의 등장이 '혁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학계의 '자만심'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태도' 자체를 뒤흔들었다. 양자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갈릴레이-뉴턴의 고전 물리학계는 합리적인 인간의 사고로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날이 머지 았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기의 수학자였던 라플라스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라는 무서운 말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뉴턴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오류라고 치부해서 무시하고 있었던 일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점차로 드러나기 시작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더 이상 오류가 아닌 어떤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자만심으로 가득한 과학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채복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써 '양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에너지'라는 것은 인과관계가 뚜렷한 선형적 존재가 아니라 아주 미시세계로 들어가 보면, 뚝뚝 끊어져 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존재라는 비선형적인 세계관이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양자'라는 개념으로,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원인이 없이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들이 설명이 되었다. 


수소 원자의 확률적인 구조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지성의 진검승부부터,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인 "전자는 입자이고 파동이다?",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 이론', 벨의 정리 등등,, 백 년이 넘도록, 특정 원인으로부터 추론이 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곳저곳에서, 물리학 뿐만 아니라 뇌과학, 심리학, 철학에 이르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 애매모호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내놓고 있다. 우리가 그 기작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마음'과 '역학'을 연결시키는 이론까지 등장했다. 


'과학'이 마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학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던 '마음'을 과학의 끝판왕인 '물리학'과 연결시키다니,, 숨은 변수 이론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뭔가 그 뒤에 거대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주었다.


양자물리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땐 마냥 신기하고 재밌는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해'를 해보려고 상상도 해보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찾아보기도 했지만 점점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히 불가능해서, 내가 왜 이걸 이해해야돼? 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파인만이, "양자역학에 대해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다는 말을 보고 처음엔, '왜? 이에 대해 설명하는 과학자들은?'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알고보면 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하아,,,,,,,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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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 정리>

보통 '학문' 그리고 '논리'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믿음'과 '신뢰'를 부여한다. 그리고 '완전성'이라는 헛된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과 수학이라는 분야에 더욱 완벽함이라는 오해를 갖는데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에 카운트펀치를 가한다. 이는 수학을 포함하여 일반 이론 체계 전체에 적용이 가능하며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낸 이론적 틀과 구조로는 결코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없고, 그것이 또한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



<공리1>

'모든 이론은 증명 불가능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공리를 통해 그것들을 조합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함으로 여러 법칙을 발견하는 기법을 이용. 그러나 1830년경 수학천재 가우스가 5번째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꾸어 넣었다. 이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의 공리가 서로에 반하는 것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자체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또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문의 이론체계는 '절대적 진리의 기술'이 아니다. 어느 일정 공리를 토대로 한 논리적 사고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100년 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공리를 선택하고 모순이 없어 보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자기의 그 틀안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리2>

'A=B, B=C라면 A=C이다.'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니까, 성립된다고!'라는 비논리적인 부분에 의존한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패러독스는 논리조차 공리(암묵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행하는 논리적 사고란, 사실 '증명 불가능한 신념' 중 하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의심하는 어떤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by 데카르트. 근대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논리 1>

논리적 사고에는 반드시 비약과 모순이 있다. a=b : a와 b가 어떤 근거로 똑같다고 간주할까? 애당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가 'a=b이다. 그러니까...~다.'라는 것은 분명히 비약과 모순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논리적 사고의 정체이다.



<모순> 

누군가가 '그것은 모순이다!'라고 말했어도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만들고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도록 공리를 제멋대로 정한 것은 그 자신이니까. 만약 우리가 모순을 마추쳤을 때,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공리의 변경'이다.



<언어게임>

말이란 객관적인 근거에 따라 성립되지 않으며 전통적, 문화적으로 정해진 생활양식이라는 Rule을 근거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비트켄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이 정한 룰 안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하고 있으니까 결국 논리라는 것은 '자작연출'이다. '자작연출'



<이데아론>

'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삼각형'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도구주의>

도움이 되기만 하면 이론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는다.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도움 되는 지식인가 아닌가'이다.





인간은 어떤 기반 위에 사는가?

진실 위에 살아가는 존재일까?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암묵적 공리에 살아가는 존재인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은 우리 인간이 구축한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완전하나 우리 인간이 스펙트럼으로 비추어지고 건설한 사회는 결국 진리가 아닌 Mind로 이룩한 것이다. 고로, '공리'로부터 출발한 이 모든 것은 불완전함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나약함을 직면하라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절대적 상대성에 이해하고 겸허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이 관전 포인트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개념을 공리로부터 도출해내어 완전성의 믿음을 부여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절대적인 삼각형, 완벽하고 완전한 삼각형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보지 못했다. 여기서 본 적이 없음을 인정할 때, 다른 것에도 잡아떼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가 몸에서 우러나온다.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리적이다.'라는 말도 그저 우리가 만들어낸 생각의 방식에 한 약속이며, 일종의 게임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속에 들어있을 엄청난 수의 공리가 서로 얽히고 얽혀 생각의 방식을 규정짓는가.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특성 안에서 놀음하고 있지 않는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아름다움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by Terius

posted by BU editor

(기존에 있던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 후기를 수정/보강했습니다.)


학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과 과정에 대해 공부하는 건 학문을 넓고 깊이 파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한다. 학문의 실체를 알아야 환상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 사실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반 대학에서는 이 내용에 대해 접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책의 1장은 대학을 대신해 우리가 기존에 갖은 학문에 대한 환상 또는 오해를 산산히 부시고, 이론이 무엇이고, 학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보게 만든다.


우리의 몸이 처음엔 단 하나의 세포로 시작해서 수많은 분열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모든 학문도 단 하나의 명제에서 시작했다. 학문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명제가 ‘공리’인데, 공리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히 자명한 법칙’을 뜻한다.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데, 자명해 보이므로 공리로 하자고 ‘약속’한 것이다. 학문을 지탱하고 있는 최초의 기둥이 약속이라니! 누가 생각해도 학문의 기둥은 단단하고,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약속만 다시 하면 사과가 배로 불려도 상관없듯이 그 기둥은 실제로는 전혀 단단하지 않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기본 공리를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기하학은 매우 객관적이고, 정교하며 완전한 학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느 학문처럼 기하학을 만든 최초의 공리는 증명되지 않다. 따라서, 만약 공리에 오류가 있다면 기하학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학문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우스가 기존의 평행선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꿔 놓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었다. 이는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지만, 학문 안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모순’도 공리에 의해 존재하는 개념일뿐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관측된다. 상식적으로는 빛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즉 말이 안되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위의 사실이 맞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모순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은 특정한 틀 속에 있을 때만 발견된다. 그리고 그 틀을 받치고 있는 건 약속으로 만들어진 공리이다.


    실재   |   공리   →   논리   →   정리   →   이론   →   학문


빛이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존재한다는 건 실제로 관측된 ‘실재’이다. 하지만 약속은 '실재'를 담아내는 게 아닌 인위적인 무엇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실재'보다 논리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약속으로 이루어진 공리, 그리고 공리로 이루어진 학문은 결국 위의 관측 결과를 담아낼 수 없는데, 바로 이 사실을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학문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의 세상은 진리 위에 기초한 게 아니라, 약속 위에서 세워졌다."


애당초 수학, 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시작을 보면 그 속엔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치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근거로 하나의 세계관이 구축된 것이다.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이다. 뉴턴의 방정식이 왜 그렇게 구성돼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용하게 쓰이기만 한다면 오케이다. 이렇게 학문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문해석학을 사이비 학문이라고 깎아내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이 학문을 공부해도 괜찮을까? 이게 정말 맞는가? 왜 이렇게 된다는 거지? 라는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기존의 관점과 다르고, 기존의 논리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니다. 학문은 그 틀안에서 논리적으로 문제없는 결과들이 도출되기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떠한 학문도 '실재'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기에 특정 학문에 집할 필요도 없다. 자료가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배열되는 게 진실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그 틀 안에서만 진실할 뿐이다. 한쪽의 시각만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걸 증명한다는 건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지고, 자신이 만진 부위만을 코끼리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의 마인드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찾기 애쓴다는 걸 인식하고 마인드적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 우리는 학문을 대할 때, 그저 '도구주의적' 입장을 취하면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되는가, 즉 유용성에 따라 학문을 취할지 버릴지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언어로 인해 구분된 학문의 경계를 알고,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러 학문들을 통합할 수 있고, 거기서 나오는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생소하거나 쉽게 공부하지 못했던 학문도 두려움이나 이질감 없이 접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과 경제학은 나누어진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자도 어디가 경계인지 말할 수 없다. 현재 보이는 경계는 단지 약속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 거기엔 근거가 없다. 이름이 붙여지는데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이론은 다면적인 현실의 특정한 한 측면을 보여줄 뿐이다.


유용성을 얻기 전에, 유용성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성 또한 알아야 한다. 학문할 때, 도움이 되는 부분까지만 취하는 걸 넘어서, 이것만이 맞다고 집착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신념을 형성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편협한 사고는 또한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가둘 수있다. 하지만 이 역시 좁게는 학문이, 넓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실재’에는 약속을 토대로 만들어진 학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널렸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학문이 실용적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게 사실이다.


학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된 건지, 왜 경계가 생겼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학문하는 태도를 갖추게 만든다. 학자적 태도를 갖춘 사람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을 열린 태도로 검토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삶에서 일어나는 '실재'들, 예를 들면 인간관계, 소통, 결혼, 일 등을 경험할 때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학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연구를 통해 굴러가는 이 세상 위에 올바르게 서있을 수 있는 힘이 된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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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학문을 통해 유용성을 얻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애초에 인간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또 서로 인식한 바를 나누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냈다. 즉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앎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해 내가 '안 것’을 설명하고, 의사소통하는 '유용성'을 마음껏 누린 대신 '절대성'이라는 대단한 무언가를 놔버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앎'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지만, 그 '앎'을 100%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언어는 약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엄청난 한계를 가진다. 평소에 쓰는 언어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인다. 특히 학문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언어는, 실제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사전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의 뜻을 찾고, 뜻풀이에 나와 있는 단어를 또 찾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폐쇄적인, 순환하는 원을 만든다. 결국 최초로 정의된 단어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언어인 것이다. 이는 언어가,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해 표현되는 학문, 논리, 인간의 이성 또한 절대적인 것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인간은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사고하지 못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결코 앎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인식론을 발전시켜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건지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생기게 됐다.(물론 이 또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인 언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론의 연구는 '철학'적 사고의 본질이 된다. 그리고 이 인식론이 심층적인 수준에 접어들어 '인간이 사물, 세상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학문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학문을 만들고 공부하게 됐는지 그 시발점을 찾는다면 그 중심엔 인식론을 본질로 한 철학과 과학이 있다. 그래서 학문을 시작하는 시점이 있는 사람이 철학사, 과학사를 공부한다는 건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어떤 책을 읽어도 대부분 철학과 과학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그게 바로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링크 포인트가 된다. 그걸 모르고 그냥 개별적인 지식만 공부한다면 그냥 조각 모음하다 끝날 수 있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 그리고 철학사와 과학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단단한 지적 기반을 쌓을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도 평생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진짜 열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본질, 과학, 철학 어느 것 하나 중요시하지 않는다. 각 분야별 전문가의 무지일 수도 있고(이게 학문의 기반일 거라 생각 못하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행사하려는 정치적인 펜듈럼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결국 단절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단지 학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스스로의 세계에 갇히고, 관계적으로도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다. 과학사, 철학사를 보면 시대가 어떻게 순환하는지 그 원리를 알게 되는데, 이 사실을 깊이 알면 삶을 근시안적으로 살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과학사, 철학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봤는가'와 관련한 수많은 관점들을 알게 된다면 사고가 더 확장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더 열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철학과 과학을 뺀다는 게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삼성, 마이크임팩트, 여러 대학, 방송사 등에서 많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가’하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인문학의 본질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기반이 어떠한지 모르고, 그저 인문학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인문학의 본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풍요롭게 하고, 교양을 쌓는 데에 의의를 둔다면 상관없지만. 이는 내용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모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인간이 단어 하나를 만들고 정의하는 것은 끝없는 지知의 우주를 개척해나가는 것과 같다. 마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캐릭터가 움직여 지도가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가 없으면 사고력의 확장도 없다. 하지만 정의는 왜 그런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약속’의 과정이며, 언어를 통한 사고와 판단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는 말로는 절대, 절대적인 것을 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렇게 자명하게 실존하는 ‘나’가 누군인지도 절대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의식 수준이 1~1000에서 400대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으로, 학문으로, 언어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으면, 머리로 이해가 안되면 존재하지 않으며 거짓인 걸까? 학문은 우리에게 굉장한 유용성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모든 학문은 세상을 한 측면에서만 설명하기에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유용성으로 인해 그 학문만을 맹신하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심판해 결국 고립되는 등의 피해를 볼 수 있다. 학문을 깊이 하기 전, 내가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자각하고,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진짜 지혜를, 올바르고 건강한 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의 시작과 태도의 시작은 같이 간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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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BU_class 2014. 4. 6. 22:40

사실 인류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에 갖춰야 할 Mindset은 분명 존재한다. Beyond University에서 배우는 것은 바로 이 최소한의 Mindset이라 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최소한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사고방식은 생존과 더불어 균형 있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 요소이다. 21세기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과학이다. 고대과학이 아닌 근대과학(=뉴턴역학)과 현대과학(=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는 사실 인류 지성에 대한 경외심과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학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특히나 과학에서도 엄밀성과 객관성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수를 느끼게 해준다. 뉴턴으로 인해 근대과학이 태동한 과학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과학이란 애초에 형이상학적 질문을 답하기 위한 학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양적 연구를 통해 객관적이고 엄밀하게 탐구할 수 있는 것만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매우 협소해 보이고 소소해 보일지라도 검증된 방식으로 차곡차곡 쌓여 인류 지성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한 발전이 인류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대인이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사와 과학만 아는 것은 절름발이가 될 위험이 있다. 과학을 한 걸음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정말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과학이라는 것에 문제는 없는지? 의문을 던지며 과학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철학은 매우 큰 위상을 갖는다. 과학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분야에 불과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엄밀하고 객관성을 지닌 과학 특히, 근대과학과 현대물리학을 주로 탐구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분야다. 과학철학을 공부하게 되면 놀랍게도 과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 분야와는 다르게 어떻게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끊임없이 과학과 함께 발전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최근엔 인지혁명 이후 인지과학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과 반대 극단에 있는 종교와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심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심리학은 크게 4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1세대는 정신분석학, 2세대는 행동주의 심리학, 3세대는 인본주의 심리학, 4세대는 자아초월 심리학으로 말이다. 종교와 영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학문으로 자아초월 심리학이 있다. 이 학문은 수많은 철학, 종교,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학문을 통합시켜 영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어떠한 종교적, 영성적 편향을 벗어나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과 영성 사이의 가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철학을 들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철학, 종교와 영성에 대해서는 형이상학 그리고 주체가 객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는 인식론을 들 수 있다. 결국 한 인간이 생각하는 총체적 체계는 하나의 사고 체계를 이루고 이 세상에는 70억이라는 인구수만큼이나 70억의 철학체계가 존재한다. 인류를 이끌어 온 것은 시대적 역사적 흐름과 함께 사상이 지배해 왔기 때문에, 서양 철학사를 통해 인류가 어떠한 사고에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는지를 심도 있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지혁명 이후 모든 학문의 근간에 대해서 새롭게 재조명해야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대학의 인지과학에 대한 미비한 발전을 뒤로하고 주체적으로 인지과학에 대한 지식을 접해야 한다. 학문의 근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인지과학의 영향이 점점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사실 인지과학의 발달로 서양철학 안에서 한 기둥을 담당한 인식론은 그 자체로는 이제 무의미해졌으며 19~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힘을 잃었다. 인지과학의 흐름인 [고전적 인지주의 - 연결주의 - 뇌 - 대니얼 카너만의 휴리스틱스 - 내러티브적 마음 - 체화된 인지] 의 맥락을 전반적으로 이해해 두어야 한다. 

이외에도 카오스, 복잡계, 사회네트워크 이론과 양자정보이론과 같이 과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분야와 미래학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언어, 공리, 논리, 학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로버트 기요사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용인/자영업, 전문가/사업가/투자자의 사분면을 이해함으로써 각 분야의 사람들이 돈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통합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도 결국 이 4분면에서 벗어나 경제적 활동과 사고방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Beyond University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21세기에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 쌓아야 되는 근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곳이고, 각 분야에 대해 스스로 접근하여 교양을 쌓고, 생존과 자아실현에 반드시 필요한 Mindset갖추게 동기부여를 한다. BU멤버는 각자 한국 대학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반드시 알아야 할 Mindset을 갖추어 나가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나가 인생을 완성시키는 삶을 지향한다. 뿌리를 깊고 균형 있게 제대로 잡아주는 교육을 하는 곳이 바로 Beyond University이며 이러한 교육에 있어 한국의 어떤 교육 과정도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by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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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윌버ken wilber, '존재의 대사슬'

BU_class 2014. 4. 6. 22:39

우리는 '과학'과 '종교'라는 2가지 거대한 펜듈럼 속에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망각하고 있거나,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탁월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결코 피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직면해야 할 커다란 과제다. 

인간 본성과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이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한 사유다. 그러나, 우리가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선 이성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필연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는 곳이 바로 종교의 영역이다. 문제는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이 없이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도(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 종교적 체험이 진행 중이지 않는 상태라면) 결국 언어적 사유, 이성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무엇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종교적 한계와는 달리, 과학은 반복할 수 있는 실험적 검증과 반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리학이란 좁은 의미에서의 과학은 물질 영역 하에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검증된 지식의 총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대상만을 다루는 영역을 탈피하여, 과학이란 것이 실험적 검증 가능성과 반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는 체계라고 정의한다면 인문과학, 사회과학과 같이 비감각적, 비경험적, 비물질적, 형이상학적인 영역까지도 과학이라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다시 돌아가서, 종교 영역 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논증되고 반증 가능성이 열려있으면 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다. 에릭 샤프(종교학자)는 종교 현상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실험 대상자들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험적 통제가 상대적으로 쉬운 심리학 분야에 비할 경우 발전이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사실상 이 분야의 발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윌버는 명상과 요가에 관한 동양의 경전과 묵상, 내적 기도에 관한 서양의 경전 안에는 어떤 규칙과 실험 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올바르게 따른다면 존재의 대사슬의 4,5단계의 연구 영역인 영혼(soul)과 정신(spirit)을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험적 검증은 통제에 따른 훈련받은 명상가를 통해서 입증 혹은 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존재론적 도식을 수용한다면, 더 이상 물리학과 신학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하위 영역의 학문을 하는 것에 상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상위 영역의 학문을 하는 것에 하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심리학, 생물학, 물리학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학과 물리학의 논쟁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신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어떤 신학자들은 활자 근본주의적(= 성경 근본주의) 관점에서 검증된 과학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또한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교인을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생물학자들은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영역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미지. 존재의 대사슬

이미지 출처 _ http://bridgeacrossconsciousness.net/wiki/index.cfm?ssid=100608


이를 통해 4가지 큰 자각을 할 수 있었다.
첫째, 현대 물리학(상대성이론, 양자물리학)과 신비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유의해야 겠다는 생각을 통해 자기계발, 영성관련 서적에서 범하는 현대 물리학에 대한 잘못된 인용을 파악하는 힘이 조금이라도 생긴 것.

둘째, 신비주의라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위영역에 내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통해, 신비주의, 깨달음, 종교적 경험 등만이 옳은 길이며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라는 생각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 것.

셋째, 종교적 체험 영역 또한 과학적 검증 가능한 길이 존재하므로 분별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

넷째, 학문 간의 위계관계를 통해, 쓸모없는 논쟁과 에너지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게 된 점.

cf. 영혼(soul)과 정신(spirit)은 켄 윌버가 독자적으로 재정의했으므로 유의할 것


by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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