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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30 '공리'를 알면 학문의 실체가 보인다.
- 2014.06.12 진실인 듯 진실이지 않은 진실 같은 공리
- 2014.06.05 '의식 수준을 넘어서' 2부 '선형적 마음' 후기 by illy
- 2014.05.27 '의식 수준을 넘어서' 2부 '선형적 마음' 후기 by Elizabeth
- 2014.05.21 '의식 수준을 넘어서' 2부 '선형적 마음' 후기 by Hakuna
- 2014.05.08 '의식혁명' 4, 5,20, 23장 + Mapping Korea 글 후기
- 2014.04.06 켄 윌버ken wilber, '존재의 대사슬'
- 2014.04.06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BU 수업의 맥락으로 풀어보기2
글
'공리'를 알면 학문의 실체가 보인다.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후기
고대 그리스 이래 '수학'이라는 학문은 한 마디로 '완벽한 것', '영원불멸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완벽할 거라 기대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수학자들은 자체적으로 완전한 수학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 그것의 기준들과 방법들을 다른 지식 영역에도 적용하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인식론자들은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수학도 어딘가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고, 그 출발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즉 수학의 확실성을 의심한 것이다.
"수학은 과연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어쩌면 우연적인 요소들이나, 참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직관적인 사실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몸이 단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된 것처럼 수학 또한 단 하나의 명제로 시작했다. 그 '공리'가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실체를 알면 적잖이 놀랄 수 있다. 공리는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지만 올바른 것으로 가정하자는 암묵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약속'인 것이다. 그저 직관적인 앎을 토대로 '그냥' 자명해 보이니까 공리로 정하자고 한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만들어진 이후, 수학자들은 위의 사실을 인지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가 다른 곳에도 적용이 된 건 순전히 관습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때문에 자유롭게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공리를 선택해 또 다른 수학 이론을 구축해나갈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수학자 힐베르트는 그렇다면, 어떤 공리를 정해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수학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공리의 수를 최대한 줄여 직관에 의지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최대한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명제를 공리로 설정해 완전한 체계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최소한의' 공리, 그리고 '모순이 없는' 공리를 토대로 어떠한 수학적 사실이든 진위를 판정할 수 있는 수학 체계를 발견해보자!" 이것이 바로 힐베르트 계획의 핵심 목표였다.
그는 첫째로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고, 둘째로 어떤 것이든 참, 거짓을 판별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이론의 첫 시작이 직관적인 앎에 근거한 약속된 공리여도 온전한 수학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힐베르트는 수학적으로 핵심 이슈인 23개의 문제를 제시하고, 앞으로 만들 궁극의 수학 체계로 이 문제들의 참, 거짓을 가리고 풀어가자고 자신 있게 말했다.
과연 힐베르트가 꿈꾸는 완전한 수학 체계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 원대한 꿈은 젊은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괴델에 의해 허망한 꿈으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23개의 문제 중 첫 번째 문제는 칸토어가 주장한, '자연수와 실수 사이의 무한집합은 없다'는 '연속체가설'이었는데, 괴델은 1940년 이 가설이 현재의 집합론 안에서는 거짓이라고 판정할 수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게다가 1960년 수학자인 코헨 또한 이 가설이 참이라고 판정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결국 이 두 발견으로 인해 '연속체가설'이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가설임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결국 첫 번째 문제부터 어떠한 수학 체계 안에서 그 공리들이 모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음을 밝혀져 힐베르트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괴델은 제1불완전성 정리에서 특정 명제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순이 생겨버리는 '자기 언급의 패러독스'가 수학에서도 발견됨을 발견했다.
"수학에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포함된다."(제1정리)
아무리 적절해 보이는 공리로부터 이론을 구축한다 한들 반드시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명제를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정말 그렇다면 애초에 수학은 진위 판명을 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도구였던 것이다.
제1정리의 내용으로부터 제2정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수학 이론에서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아래의 사실을 나타낸다.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다고 해도 스스로의 체계가 옳다고 증명하는 것을 그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제2정리)
이건 마치 검은 까마귀만을 여태껏 봐와서 '이 세상에는 검지 않은 까마귀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장이라도 흰색 까마귀가 등장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순을 찾지 않았다고 해서 모순이 없다고 확실할 수는 없다. 정리하면, 수학 내부에서 모순이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수학의 완전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동안의 수학자들의 깊은 신앙이었던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어떤 명제든 참인지, 거짓인지 반드시 알아낼 수 있다'는 환상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인간 이성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수학'이라는 가장 단단해보이는 학문을 대상으로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게 수학의 기본 틀을 무너뜨려 수학을 붕괴시킨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수학의 구조와 한계를 드러내 문제의 본질에 직면함으로써 오히려 더 진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학문들에도 적용되는 내용이다. 모든 학문은 공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그동안 학자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학문의 본질을 마주하게 됐다. 그래서 그들이 얻게 된 결론이 무엇일까? 학문의 완성도는 공리의 참, 거짓 여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 공리를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결과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학문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이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무시할 수 없는 학문의 '유용성' 때문이다. 학문은 절대로 진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지만,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실험하고, 검증하고 연구해 세상의 현상들을 잘 설명하고 풀이해준다. 우리는 학문을 일종의 도구로 여기고 최대한의 유용성을 뽑아낼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학문을 제대로 하기 전에 이런 인식론적인 공부가 선행되야 학문의 타당성과 유용성을 잘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학문하는 진정한 태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학문의 원리, 구조, 한계를 알고 특정 학문에 필요 이상의 중요성을 두지 않고, 또 세상을 각자의 입장에서 표현하는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 학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이성과 학문을 통해 굴러가는 이 세상 위에 올바르게 서있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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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공리1,2 _ 진실인 듯 진실이지 않은 진실 같은 공리
공리는 절대 증명할 수 없는 하나의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설계하는 최초의 시작점이 되기에 우리는 '자명하다', 또는 '인간의 직감적 이해와 일치한다'라는 이유로 필요 이상으로 절대시해왔다.
증명할 수 없다는 건 그 공리가 100% 진실인 것인가를 판가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객관적인 태도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자명하다고 느끼거나 권위를 통해 나온 사실들에 대해 아래의 말을 하며 당연시해왔다.
"그냥 그게 맞잖아."
"그게 당연하잖아."
또는
"그게 대세잖아."
감히 공리를 의심하고, 다른 것으로 바꿔볼 생각을 못해온 것이다. 하지만 완벽해보이는 기하학도 단순히 공리를 전혀 다른 내용으로 교체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을 전혀 모순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비유클리드의 기하학의 탄생은 공리가 자명한 진리라는 생각을 뒤엎은, '충격적인' 시도의 결과였다.
많은 학자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몸부림 쳐왔다. 예를 들어 논리학을 통해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 수학의 권위를 더 단단히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를 위한 도구인 '논리' 또한 그 근본을 보면 '약속' 위에 새워진 것이기 때문에 결과는 항상 실패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이 좌절했다. 실제로 버틀란드 러셀은 기하학의 공리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믿어야만 하는 자명한 것이라는 사실에 수학의 확실성이 흔들리자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진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의식혁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이성의 결과인 '학문'을 통해 이 불확실한 세계를 설명하는 건 인간의 욕심일 수 있다. 연구하면 할수록 불확실함은 더 두드러질 뿐이다. 사실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공리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설정을 통해야만 인간으로서 탐구가 가능해진다는 걸 가르킨다.
이는 비단 학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공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공리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든 것처럼 지금 이 사회에 공공연한 공리 또는 나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봐야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안좋은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사회 그리고 나의 신념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에 끌려다니는 걸 멈춰야 한다.
공리 없이 학문은 만들어질 수 없다. 사회도, 삶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것을 지탱하는 명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굉장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예를 들어 부정확한 신념 또는 사회의 일방적인 조건화들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자각하고, 건전하게 의심해서 '진실'로 밝혀진 것이 아닌 거에 대해 에너지를 뻇길 필요가 없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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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수준을 넘어서' 2부 '선형적 마음' 후기 by Audrey (0) | 2014.06.05 |
글
'의식 수준을 넘어서'에는 각 의식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 감정적 특징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각 의식 수준의 한계점들, 의식 수준 상승을 위한 태도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있었다.
1. 그 '태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낮은 마음과 대비되는 높은 마음의 세상에서 세상은 전혀 다르게 경험되고 보인다."
"과거에 악마화되었던 것은 이제 '악천후와 해일' 같은 것으로, 혹은 미워해야 할 것이 아닌 '계산에 넣어야 할 자연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낮은 마음의 태도와 높은 마음의 태도의 비교로, 하나의 세상에 대한 다른 인식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 주었다. 높은 마음일 때의 태도는 '강한' 느낌이 든다. 강함과 약함은 그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강해진다는 것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어지는 상태, '뒤'가 깨끗한 '용기'이다. 용기를 낼 때 정직해지고 수용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2. 각 의식 수준의 한계
특정 의식 수준을 초월할 때 넘어야 할 한계는 그 의식 수준에서 '붙잡고 있는 무언가'다. 더 높은 의식 수준으로 도약할 때의 장애는 그 한계에 매달린 결과인 것이다. 도약을 위한 태도는 붙잡고 있는 그것을 '놓는 것', '내맡기는 것,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통일된다. 이러한 태도를 보조하는 것은 깊은 '자발적' 겸손함이다. (이때의 겸손함은 '겸손한 척'과 다르다.)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것, '패러다임 맹목'에서 재맥락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루어진 언어, 학문으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라는 학문의 한계를 각 학문들의 의식 수준이 400대에 머무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500 이상인 '사랑'의 수준, 영적인 수준으로 넘어갈 때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가 '선형적'에서 '비선형적'이 된다. 비선형적인 영적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선형적'인 '인간의 이성, 학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400대 의식 수준에서 얻은 '지성'이 한계가 되느냐, 또 한 번의 도약, 영적 실상의 이해에 이르는 발판이 되느냐 하는 것은 다시 겸손하게 수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3. 500대의 의식수준
"사랑은 가슴에서 흘러나온다." 정말 많이 듣던 흔한 말인데, '헛말이 아니구나' 한다. 더 이상 머리(이성)로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맥락의 엄청난 확장이 다시 한 번 일어난다. 500대의 의식 수준에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예전에 이게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던 사랑과는 달랐다. 낭만, 정열, '미친듯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낮은 의식 수준의 감정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지며, 과장되고, 일시적인 감정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분별력이 더 상승되며 평온한 상태이고 기쁨의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 안에서는 감정적 싸움도, 상실의 괴로움도, 서로 간의 기대도 없다는 것. '사랑'의 의식 수준을 설명하는 글을 읽을 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설명 자체에도 사랑이 깃들어 있는 듯(?) 했다.
이 수준에서 또 한 번 넘어야 하는 한계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편애'를 벗어나는 것, 정말이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살인자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 자발적 용서, 자발적 겸손함이 또 한 번 넘어야 될 산이다.
4. 그 외 생각들
예전에 그런 느낌을 받고 울었던 적이 있다. 내가 짐을 한가득 매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버겁고 힘들면서도 그 짐을 놓아버리는 데에 대한 두려움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자유롭고 싶은데 이 짐들을 어떻게 놓을 줄 몰라 마구 울었던 적이 있다. 그 무거운 짐이 뭔지 몰라서 그랬던지도. 의식 수준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내가 겪었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용기를 내서 나 자신에게 정직해지고, 모든 걸 수용하는 것이 답이었다.
"마음이 침묵에 든 채 주변과 더불어 그냥 '있게' 해 주면 안도가 찾아든다. 그 결과 평화가 깃들고, 감상과 평온이 우세해진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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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내가 '의식의 지도'를 어느 순간부터 내 영혼이 올라가야만 하는 강압된 '목표'로 바라보며 고통받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왜 이 수준인 걸까. 어떻게 하면 위로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이 수준이기 때문에 나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는 것일까'
강력한 '에고'로 인해 나는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또다시 의식의 지도라는 정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받는 이유는 내가 '에고'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마음'에서의 행복률이 22%인 것은 바로 이와 관련 있다.
에고는 사람이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산으로, 그 기원은 생존에 대한 중요성이다. 그러므로 에고의 강력한 지배를 받는 의식 수준 200 이하에서는 동물 생존의 기술과 감정들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지배를 받는다. 반면에 의식수준 200 이상부터는 진실과 정렬됨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며 성격과 특성뿐만 아니라 뇌 생리 또한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200 이상의 에너지 장에서 사는 삶은 그 수준 이하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용기(200)의 수준에서는 진실과 정렬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하는 중대한 기점이다. 이제 인간은 강력한 긍정적 에너지를 가지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에너지가 중립(250)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낮은 위치성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므로 사회적으로 느긋한 '공존'의 상태이다. 매력에 대해서도 혐오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는 중립 상태에서는 삶이라는 강물을 유유히 흘러간다.
중립의 상태에서 영혼은 앎과 표현의 한층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하게 되고 자발성(310) 에너지 수준으로 나아간다. 자발성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발전하고 성장한다. 하지만 이 수준에서는 여전히 '사적인 자기'즉, 감정에 물든 위치와 추정된 가치들에 의해 지배받는다. 자발성 수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영적 정보의 획득에 대한 긍정적 태도로 상위 목표에 이르기 위한 학습기간과 인내가 요구된다.
에너지 수준이 수용(350)에 도달하면 행복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각성과 더불어, 삶의 낮은 힘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특징으로 한다. 왜냐하면 이 에너지 수준에서는 선악을 양분하는 분별적 사고와 이원적 정신작용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해, 의의, 의미를 덮어버리는 '낮은 수준의 감정 주의'가 초월될 때, 지성과 합리성이 부상하여 이성(400)의 수준으로 도약한다.
이성(400) 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아진 합리성, 개념화, 이해 능력의 수준이다. 이 수준에서 감정은 여전히 현존하고 고려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지배적이거나 논리와 이성을 대체하지 않는다. 이성은 논리가 지배하는 기술적 세계에서는 효율적이지만, 더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르는 데는 큰 장애가 된다. 그것은 정보의 지적 획득 자체에 대한 자부심같이, 자기와 마음의 동일시 때문이다. 이 수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하여 아는 것'에서 무엇이'됨'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의식의 성장은 인위적인 '가짜'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진실과 정렬하려는 진정성 있는 '태도'이다. 겸손함, 내적 정직성, 책임, 자신보다 더 큰 어떤 힘에의 내맡기는 태도로 매 순간순간을 내 존재대로 온전히'있는'다면 어느 순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은 성장해 있을 것이다.
by Elizabeth Taylo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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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낮은 의식 수준들에서 에고는 일차적으로 동물 생존의 기술과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삶을 지배하는데 이러한 삶은 쾌락, 포식, 이득과 정렬되어 있다. 사람과에서 지적 능력의 진화적 진보는 전뇌의 출현으로 가능해졌는데 이 신생의 정신 능력, 인지는 의식 수준 200 이하에서 일차적으로 생존, 공격, 지배의 동물 본능을 돕는 데 이용되었다. 의식이 200수준 이상으로 진화하면서, 생명과 앎의 에너지는 점진적으로 사랑의 비선형적 실상들과 박애, 영적 진실의 탐구와 정렬되었다.
진실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의식 수준과 일치하는데, 사건들의 연쇄에 대한 기억은 뇌의 해마 영역에 저장된다. 의식 수준 200이하에서 기억이 에고의 원시적 생존 목표와 생존 기술로 맥락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의 일어나는 회상은 사건들의 그러한 연쇄에 대한 기억을 다시 일깨운다. 따라서 기억은 부정적 감정에 물든 채 두려움, 불안, 분노, 분개, 혹은 이득의 쾌락과 더불어 저장된다. 의식 수준 200 이상에서는 우뇌(왼손잡이는 죄뇌)에서 우세해지게 되는데, 입력은 중계 중추를 경유하여 전전두 피질, 감정 중추로 빠르게 전달된다. 따라서 지각은 지성에 의해 수정되고, 일반적으로 회상은 순전히 좌뇌 반응으로 기록되었을 경우보다 온전해진 사건에 대한 회상이다. 우뇌의 영화된 뇌 정보 처리와 영화된 뇌 생리로 인해, 신경 호르몬 반응은 엔돌핀을 방출하고 경락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편도체(감정 중추)로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분비되는데, 이것은 모성 본능 부성 행동, 암수 결합, 그리고 포유류의 사회적 뇌를 매개로 한 사회적 능력과 관련된다.
의식수준 200 이하에서 이상으로의 점진적 변화는 온전성을 반영하는 대조적 쌍들 사이에 존재한다. (갈망, 욕망, 꼭 가져야 함, 정의, 특수화, 지루함 / 선호, 희망, 선택, 본질, 일반화, 뛰어남 등) 의식 수준 200을 뛰어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서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데, 200 수준이 거짓에 지배되는 상태에서 진실과 정렬됨으로의 이행을 가르킨다는 면에서 한층 더 중대하다. 아직 세계 인구의 78%가 200이하로 측정되고 있는데 200 이상의 수준에서 힘의 엄청난 증가로 인해, 온전성에 전념하는 인구는 전 세계 인구 대다수의 부정성을 상쇄한다. 그래서 문명은 살아남아 진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자발성은 의식 수준 310으로 사람이 삶에 대한 내적 저항을 극복했다는 것과 참여에 몰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발성은 쾌할하고 협조적이며, 자진해서 나서는데 다른 상태에서라면 저항, 지체, 불평에 낭비될 여분의 에너지가 있다. 이런 영적 정렬과 봉헌을 통해 영적 에너지 수준이 상승하여 우뇌의 화학과 생리를 강하게 활성화시킨다. 이것은 지각을 변화시키고 뇌에서 동화적 신경전달 물질과 엔돌핀을 분비한다. 따라서 세계는 보다 온건하고 우호적이며, 지지적으로 보인다. 자기애적 에고를 포기한 귀결로서 지각의 왜곡이 감소하는데, 지각의 왜곡은 사리를 추구하는 위치성들의 결과이다.
수용은 의식 수준 350으로 이 앎의 수준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경험의 근원이자 창조주라는 이해와 더불어 큰 변형이 일어난다. 수용의 수준에 있는 개인은 시비분별에 관심이 덜해지고, 그 대신 쟁점의 해결 및 문제 처리 방식을 찾아내는 데 전념한다. 시비분별의 내맡김에 저항하는 것은 에고의 부풀어 오른 자기 중요성인데, 이것은 에고가 스스로를 정당한 것으로, 도덕적 가치의 최고 결정권자로 보는 데서 생겨난다. 수용은 부정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 대신 현실적 지각과 에고의 타고난 한계에 대한 인지로 부정을 대체한다. 수용은 '흑백'의 이원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비분별의 유혹을 우회할 수 있다. 수용은 지각된 성질이 인간 조건에 본유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집단 카르마는 물론 개별적 카르마를 반영하며, 호모 사피엔스 종에 본유적임을 안다.
이성은 의식 수준 400으로 지성과 합리성은 낮은 수준의 감정 주의가 초월될 때 전면으로 부상한다. 이성은 대량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고,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복잡한 관계와 점진적 변화, 미세한 구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과 의학의 수준이며, 높아진 합리성, 개념화, 이해 능력의 수준이다. 400대의 의식 수준은 대단히 복잡한 선형적 추상과 상징들을 종합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 및 미래예측적 확인은 물론 의의와 이미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의 출현을 나타낸다. 지성은 연쇄를 매개로 우선순위 결정을 분류 체계로 층화 시키는데, 이러한 분류 체계는 패러다임, 영역, 범주, 부류, 종, 아종, 속, 특정한 사례와 유사하다. 생각하고 추론하는 능력은 영성 심리학과 밀교 심리학은 물론 과학, 심리학, 철학, 형이상학, 정신 분석학 등의 학문 분야를 낳았다. 역학이라는 단어가 기능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높이기 위해 이 모든 것의 측면에 첨가되었다. 의식, 이성, 논리, 지성의 진화에서, 이러한 것은 진실에 대한 헌신과 정렬됨으로써 에너지를 충전받는데, 진실을 사실상 신성의 한 측면이고 마음의 장 자체가 갖는 힘의 보이지 않는 근원이다. 진실과의 정렬이라는 선물은 이해력을 낳고, 지혜와 현명함의 축적으로 귀결된다.
400대의 의식 수준이 가리키는 것은 감정은 여전히 현존하고 고려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지배적이거나 논리와 이성을 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함'은 임의적 정신 작용일 뿐이지만, 반면에 이성은 변증법과 규육, 논리 규칙들의 한계로 제한되며 논리의 규칙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수학이다.
400대의 의식 수준에서 500대의 수준으로의 이행은, 선형적 상징들의 정신계에서 비선형적 주관성으로의 패러다임 도약이다. 마음은 지식의 획득에 만족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변형을 일으키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변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내면의 경험적 실상으로 변환시키기 위한 것 이상의 단계가 필요하다.
by Hak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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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어떤 사건의 사전 맥락과 그 사건을 명명할 수 있는 언어가 있기 전에는 사람은 그 사건을 관찰하거나 인지할 수 없다는 점이 종종 지적되었다. 패러다임 맹목으로 불리는 그러한 무능력은 맥락이 갖는 한계의 직접적 귀결이다."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에 봉착했을 때, 의식과 맥락 자체에 대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의식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진실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하기에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적 탐구만으로 의식을 체계화할 수 없다는 문제에 맞닥뜨린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이 이미 어떤 의식 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 영역을 탐구할 때, 이성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영역에서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David Hawkins 박사는 Kinesiology와 비선형 동역학 연구에서 시작된 방법론인 끌개 연구를 채용함으로써 1~1000의 척도로 나타낼 수 있는 의식의 지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견된 인간 의식에는 3가지 주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온전성, 용기', '이성의 초월, 영성', '이원성의 초월, 비이원성' 이다. 각각이 나타내는 수치는 200, 500, 600인데,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의 의식 수준을 이 수치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by Hak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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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리는 '과학'과 '종교'라는 2가지 거대한 펜듈럼 속에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망각하고 있거나,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탁월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과학과 종교는 결코 피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직면해야 할 커다란 과제다.
인간 본성과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이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한 사유다. 그러나, 우리가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선 이성만으로 한계가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필연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는 곳이 바로 종교의 영역이다. 문제는 직접적인 이해와 체험이 없이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도(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 종교적 체험이 진행 중이지 않는 상태라면) 결국 언어적 사유, 이성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교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무엇이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종교적 한계와는 달리, 과학은 반복할 수 있는 실험적 검증과 반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리학이란 좁은 의미에서의 과학은 물질 영역 하에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하여 검증된 지식의 총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대상만을 다루는 영역을 탈피하여, 과학이란 것이 실험적 검증 가능성과 반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는 체계라고 정의한다면 인문과학, 사회과학과 같이 비감각적, 비경험적, 비물질적, 형이상학적인 영역까지도 과학이라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다시 돌아가서, 종교 영역 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논증되고 반증 가능성이 열려있으면 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다. 에릭 샤프(종교학자)는 종교 현상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실험 대상자들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험적 통제가 상대적으로 쉬운 심리학 분야에 비할 경우 발전이 상당히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사실상 이 분야의 발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윌버는 명상과 요가에 관한 동양의 경전과 묵상, 내적 기도에 관한 서양의 경전 안에는 어떤 규칙과 실험 등이 있기 때문에, 이를 올바르게 따른다면 존재의 대사슬의 4,5단계의 연구 영역인 영혼(soul)과 정신(spirit)을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험적 검증은 통제에 따른 훈련받은 명상가를 통해서 입증 혹은 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존재론적 도식을 수용한다면, 더 이상 물리학과 신학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하위 영역의 학문을 하는 것에 상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상위 영역의 학문을 하는 것에 하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심리학, 생물학, 물리학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학과 물리학의 논쟁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신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어떤 신학자들은 활자 근본주의적(= 성경 근본주의) 관점에서 검증된 과학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또한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교인을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생물학자들은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영역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미지. 존재의 대사슬
이미지 출처 _ http://bridgeacrossconsciousness.net/wiki/index.cfm?ssid=100608
이를 통해 4가지 큰 자각을 할 수 있었다.
첫째, 현대 물리학(상대성이론, 양자물리학)과 신비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유의해야 겠다는 생각을 통해 자기계발, 영성관련 서적에서 범하는 현대 물리학에 대한 잘못된 인용을 파악하는 힘이 조금이라도 생긴 것.
둘째, 신비주의라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위영역에 내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통해, 신비주의, 깨달음, 종교적 경험 등만이 옳은 길이며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라는 생각에 대한 위험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 것.
셋째, 종교적 체험 영역 또한 과학적 검증 가능한 길이 존재하므로 분별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
넷째, 학문 간의 위계관계를 통해, 쓸모없는 논쟁과 에너지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게 된 점.
cf. 영혼(soul)과 정신(spirit)은 켄 윌버가 독자적으로 재정의했으므로 유의할 것
by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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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논리학은 너를 A에서 B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너를 어느 곳이든 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논리는 우리가 불편을 겪지 않으려고 만든 약속일뿐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을 통해서 배우고 알 수 있는 것은 A에서 B같이 약속된 정의, 공리들 위에 세워진 상대적인 개념들뿐이다. 그러나 상상력(수업의 맥락으로 풀면 학문, 언어 등의 체계들의 상대성을 아는 것)은 약속된 개념들을 비판할 수 있는 분별력도 가질 수 있게 해줄뿐더러 공리와 약속에 매여있지 않은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단 한 번도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발견한 적이 없다.
: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과 수업의 맥락에서 볼 때 '이성적인 사고'는 상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와 언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학문을 학습하고 공부할 수는 있겠지만 자명하지 않은 것들,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같은 것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 발견할 수 없다.
by Tony
사물의 본질을 밝혀내야지 자신이 믿는 바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논리학은 너를 A에서 B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너를 어디까지나 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고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내가 나라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데카르트는 중세 시대의 신의 권위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학문체계가 틀릴 수 있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명한 진리를 밝혀낼 수 있는 인식론에 관한 철학을 확립했다.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었고, 이는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이러한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들, 사유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라는 명제는 결국 사유하는 것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공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 명제가 의의를 지니는 것뿐이다. 이러한 숨은 공리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식을 나라는 실체로 받아들여 고통을 받는다. 이는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의 의식 대역에 따르면, 자아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 데카르트는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의심한다는 것을 전제하니, '의심하는 나'라는 실체가 곧 '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의심하는 나'라는 것이 '나'라는 실체와 어떠한 필연성이 있느냐고,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또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너무도 자명해 보이는 삼단논법마저도 비논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루이스 캐럴 패러독스처럼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점을 명백하게 알았다. 자연세계를 관찰해서, 자연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수식으로 하나의 패러다임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으나, 철학자들의 사유 행위는 때때로 자연세계와 무관한 약속된 공리 위의 현학적인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는 데카르트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를 옳게 만들기 위해 논리적 타당성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첫 번째 명언)
물론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반증되지 않은 패러다임이더라도,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증되지 않는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를 모순 없이 설명 가능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하는 경우에도, 결국 학문이라는 것은 언어와 수식이라는 약속된 체계 위에서 자연세계를 묘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물리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의 위험성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뉴턴 역학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시공간의 절대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지 못 했다. (이는 특수상대성이론은 순전히 아인슈타인의 머리에서 나왔기에 참고문헌이 없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뉴턴 역학이라는 것도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공리 위에 반증되지 않은 패러다임에 불과했지만, 반증되지 않는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계관은 자신도 모르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이다.
언어, 수식의 절대성, 공리의 절대성, 시공간의 절대성. 이는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결코 자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논리가 아닌, 상상력을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자연세계(실재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들 언어, 수식, 공리, 기존의 패러다임에 자유로운 상상력 말이다. (두 번째 명언)
by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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