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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상대성에 해당되는 글 6건
- 2014.04.06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2014.04.06 인간은 학문으로, 이성으로, 언어로 절대! 절대적인 것을 알 수 없다.
- 2014.04.06 왜 '뭔가 하나를 건드려서' 무너져보면 안 되는 것인가?
- 2014.04.06 인간의 '언어'가 폐쇄적인 원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2014.04.06 언어의 속성과 분별력
- 2014.04.06 통섭 Consilience
글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자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그렇다면 '구속'은 무엇인가?
"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함."
자유를 설명하려면 구속이 필요하고 구속을 설명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며, 그래서 언어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中, 장하준」
"1819년 아동노동을 규제하기 위해, ... 아홉 살 미만의 아동들의 경우 고용을 금지한다는 법안이다. .... 많은 사람들이 이 법안이 신성한 계약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자유 시장의 기반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나 공장 매연에 대한 환경 규제에 반대했다.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환경규제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 이렇게 똑같은 시장을 놓고서도 각자 입장에 따라 느끼는 자유의 정도가 다른 마당에, 그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자유시장처럼 보이는 시장이 있다면 이는 단지 그 시장을 지탱하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규제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자유시장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시장이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암묵적, 혹은 공식적인 규제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자본주의 시대에 생기는 갖가지 크고 작은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대안을 생각해보는 데에 있어서 '더' 자유로워질 뿐이다. 번지점프를 할 때 자신을 매고 있는 줄이 튼튼한지 확인을 하고 또 해야 뛰어내리는 데에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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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인간은 학문을 통해 유용성을 얻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애초에 인간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또 서로 인식한 바를 나누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냈다. 즉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앎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해 내가 '안 것’을 설명하고, 의사소통하는 '유용성'을 마음껏 누린 대신 '절대성'이라는 대단한 무언가를 놔버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앎'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택했지만, 그 '앎'을 100%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언어는 약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엄청난 한계를 가진다. 평소에 쓰는 언어는 배타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인다. 특히 학문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언어는, 실제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사전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의 뜻을 찾고, 뜻풀이에 나와 있는 단어를 또 찾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폐쇄적인, 순환하는 원을 만든다. 결국 최초로 정의된 단어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언어인 것이다. 이는 언어가,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해 표현되는 학문, 논리, 인간의 이성 또한 절대적인 것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인간은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사고하지 못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 결코 앎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인식론을 발전시켜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안다는 건지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생기게 됐다.(물론 이 또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인 언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론의 연구는 '철학'적 사고의 본질이 된다. 그리고 이 인식론이 심층적인 수준에 접어들어 '인간이 사물, 세상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학문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학문을 만들고 공부하게 됐는지 그 시발점을 찾는다면 그 중심엔 인식론을 본질로 한 철학과 과학이 있다. 그래서 학문을 시작하는 시점이 있는 사람이 철학사, 과학사를 공부한다는 건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어떤 책을 읽어도 대부분 철학과 과학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그게 바로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링크 포인트가 된다. 그걸 모르고 그냥 개별적인 지식만 공부한다면 그냥 조각 모음하다 끝날 수 있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 그리고 철학사와 과학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단단한 지적 기반을 쌓을 수 있는 토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도 평생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진짜 열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본질, 과학, 철학 어느 것 하나 중요시하지 않는다. 각 분야별 전문가의 무지일 수도 있고(이게 학문의 기반일 거라 생각 못하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행사하려는 정치적인 펜듈럼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결국 단절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단지 학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데, 자기 스스로의 세계에 갇히고, 관계적으로도 고립되게 만들 수도 있다. 과학사, 철학사를 보면 시대가 어떻게 순환하는지 그 원리를 알게 되는데, 이 사실을 깊이 알면 삶을 근시안적으로 살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과학사, 철학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봤는가'와 관련한 수많은 관점들을 알게 된다면 사고가 더 확장되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 또한 더 열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대학에서 교양필수로 철학과 과학을 뺀다는 게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삼성, 마이크임팩트, 여러 대학, 방송사 등에서 많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가’하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이상 인문학의 본질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기반이 어떠한지 모르고, 그저 인문학처럼 보이는 것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인문학의 본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풍요롭게 하고, 교양을 쌓는 데에 의의를 둔다면 상관없지만. 이는 내용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내용으로는 모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인간이 단어 하나를 만들고 정의하는 것은 끝없는 지知의 우주를 개척해나가는 것과 같다. 마치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캐릭터가 움직여 지도가 보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가 없으면 사고력의 확장도 없다. 하지만 정의는 왜 그런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약속’의 과정이며, 언어를 통한 사고와 판단도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는 말로는 절대, 절대적인 것을 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렇게 자명하게 실존하는 ‘나’가 누군인지도 절대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의식 수준이 1~1000에서 400대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으로, 학문으로, 언어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으면, 머리로 이해가 안되면 존재하지 않으며 거짓인 걸까? 학문은 우리에게 굉장한 유용성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모든 학문은 세상을 한 측면에서만 설명하기에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 유용성으로 인해 그 학문만을 맹신하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심판해 결국 고립되는 등의 피해를 볼 수 있다. 학문을 깊이 하기 전, 내가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자각하고,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진짜 지혜를, 올바르고 건강한 태도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의 시작과 태도의 시작은 같이 간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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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리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재미가 없었고, 그 재미없는 공부를 '피상적' 혹은 '전략적'으로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도 가고 직장도 다닌다. 여전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기반 위에 쌓여만 가는 지식 아닌 지식으로 억지로 공부하고, 외우고, 시험보고 합격하고 잊어버리고 단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억지로 일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산다. '뭔가를 하나만 건드리면' 무너질게 뻔한데 그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 힘들게 힘들게 포장하고 또 포장해서 점점 자기가 만든 틀안에 갇혀 평생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뭔가 하나를 건드려서' 무너져보면 안 되는 것인가? 뭐가 두려워서 무너져보지 못하는 것인가? 왜 힘들게 힘들게 꽁꽁 감싸야만 하는 것인가?!
특정 단어에 대한 국어사전을 찾고 그 안의 단어를 찾고 또 찾다 보면 결국 처음 시작했던 그 단어로 돌아온다고 한다. 몇 단어만 찾고 찾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실체는 없고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의존적'인 관계로 버티고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상대적으로 설명이 될 뿐이며, 절대적인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이성, 언어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뭔가 하나를 건드린다는 것'으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제까지 위태위태하게 쌓여있던 지식들과, 내가 경험했다고 말하는 일들, 내 생각이라 말하는 것들, 각 학분분야의 이론들, 과학 실험들, 권위 있다, 최고다 하는 사람들의 말들, 책들,,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그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무너지는 게 무엇인가? 본래 절대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져서 산산조각 날 것도 없다. 그저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 모두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그것들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허무함과 그와 동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속에서 모든 이론을 세우고 있었던 기하학, 가우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뒤집어엎었는데도 아무것도 무너진 것은 없었다. 그래, 이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언어로 표현된 학문, 이론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공부를 해야하는가? 언어는 절대로 진짜베기를 표현해 낼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글을 읽고 써야하는가? 하는 난관에 부닥쳤다.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냥 손 놓고 밥이나 먹으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무리 공부해도 진리를 알 수 없을 텐데 뭐 하러 공부를 해야 하는가? 그런데 뭐, 재밌는걸 어쩌겠는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찾아보지 않고는 못베기겠는데, 찾고 공부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래서 공부는 안 하겠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그거 잘 됐네~! 한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하면 그만이다. 그저, 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해 엄청 열심히 공부해서 죄다 이해해 놓고 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안 좋아서 이런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긴 안다^^;), 다른 이론이 나타나 이 이론을 뒤집어 버렸을 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생길 뿐이다. (내가 완전 천재여야만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구축되어 있는 이론이 영 아닌것 같을 때, 아주 만약에, 내가 뒤집을 수 있을 때 무서워하지 않고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진리요, 나를 따르라' 하는 권위자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아주아주 조금 생길 뿐이다! (사실 아직 다 무서운 건 마찬가지긴 하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고 뒤집어질 때도 마땅히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게 가장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나만의 세상이 무너질 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발전의 길로 가는 가장 큰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BU멤버가 되면서부터, 공부하는 것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 나는 원래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타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혼자 타과 수업을 신청해 들었고, 그 과목들은 성적이 바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생명과 수업이라도 교수가 내는 과제가 엉터리면 남들 밤새면서 열두장씩 써내는 과제도 나는 수업 시작 15분 전에 달랑 세장 써내서 최하점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생물학도이니 여기에 집중해야만 하고, 공부를 할 거면 평생 생물학 공부만 해야 된다고 주입이 됐다. 남들은 전공 학점 채우고 성적 맞춘다고 재이수하고 점수 따기 쉬운 과목들을 열심히 찾아 듣고 있고, 취직을 하기 위한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난 내가 뒤처지고 있는 줄 알았다. 뭔가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의 공부는 더 이상 파낼 것도 없고 더 파낼 힘도 없는데,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그저 일상이 좌절이고 지침 그 차제였다. 그래서 더더욱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가 싫어졌다! 그런데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무엇이든 내가 생물학과를 나왔든, 아님 그냥 직장인이든, 아직 대학을 안 갔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세상에는 더 알고 싶고 재미있는 공부할 거리가 아주아주 많으며, 그걸 공부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된다는 걸 BU에서 점점 깨달아가고 있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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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 BU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BU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BU는 21.5세기를 위한 '창조적 지식'을 위한 곳이다. BU는 진짜 공부의 줄기를 잡아준다. BU는 그러나 양적인 공부는 해주지 않는다. 이는 각 개인의 몫이므로. BU가 실현하는 공부 방식은 이러하다. '양과 질'을 동시에 흡수하는, 추구하는 방식. 그것과 더불어 일정한 기간 동안 '음미'를 해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내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최고의 공부'라는 책에서 켄 베인이 말하듯 공부는 '태도'에서 많은 것이 좌우된다. 그리고 그 '올바른 태도'는 자신의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진정성 있게 선택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자기 스스로 진솔하게 의도하는 '공부', '지식'이 아니면 이미 양과 질, 음미, 응용... 이런 것들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진정성 있는 學의 길로 인도하고 스스로 존립 가능케 하는 참 사부師父로서의 학교다. 물론 사부師父도 있다.(Mr.Paul) 그러한 점에서 BU의 공부는 나에게 진짜 공부를 가르쳐줄 유용한 배움터이다. 양과 질, 음미... 아직은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조건화되어온 공부Style은 '결과'가 목적이 되는 '학점'이 목적이 되는 '등급'이 목적이 되는 그런 껍질을 핥는 식이었으므로.
물론 '결과'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16-23절 말씀 묵상] 이러한 구절이 있듯(난 종교가 없지만) 일의 결과는 언제나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조건화된 더러운 공부법은 내게 허술한 열매만을 안겨줄 것이니. BU는 내 인생의 참 열매를 맺는 그러한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그 방법은 내가 해온 습으로 인해 더 힘들 수도 있다. 농약 범벅 농사법보다는 건강한 유기농 농사법이 더욱 많은 땀을 요하듯 처음엔 더 늦어 보일 수 있다. 더 피곤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에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1세기는 창조적 지식사회이다. 『창조적 지식사회』
그러면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실체』, 『지식의 본질』
당연한 말이었지만 충격적이었다. 21세기 창조적 지식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지식'의 本에 대해 알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불패이듯, 나를 알고 지식의 실체와 본질을 알아야만 배움에 능하게 된다. BU는 나에게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다.
2. 인간의 '언어' 가 폐쇄적인 원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Mind로 정의한 공리에서 탄생한다. 개를 개라고 하고, 고양이를 고양이라 하는 Mind의 정의 + 공리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돌고 돈다. 대백과 사전의 두께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국어사전을 보라.
A를 설명하려면 B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C를 설명하려면 D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
Z를 설명하려면 A라는 어휘가 필요하다.
단편적으로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보았다. 즉, 언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A와 Z라는 언어는 현상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그들 간에 배타적으로 보인다 하여도 결국 돌고 돌아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진실은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언어는 예외 없이 상대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언어'라는 것은 '맥락'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존재다.
자,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녀석으로 기술되고 정리되는 '개념槪念'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것인가? 이쯤 되면 계산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절대적으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개념은 없다. 개념은 인간의 Mind로 공리화한 언어 텃밭과 논리 속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 또한 언어와 같이 절대적일 수 없는 놈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에 대해서도 다시 볼까.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언어와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개념이 '학문'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학문'은 예외 없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Mind로 정의한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적인 진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 이것이 이 학문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학문은 우리 인류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다. 무엇의 목적으로? '실용성' , 이것이 학문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성과 언어, 논리로 기술되는 학문은 그저 삶의 유익한 Skill, Practical Solution을 주는 역할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학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자의적으로 돈과 관련하여 구분 지을 수는 있으나 엄연히 다른 말이다. 그리고 옳지 못한 표현이다. 세상의 '학문學問'은 실용성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이상의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순 없다.
그럼 여기까지의 맥락에서 다시 '언어'의 포인트로 돌아오자면, 인간의 언어는 실용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특히, 학자라면 자신의 영향력만큼 언어의 사용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언어가 실용적일수록 그만큼 위험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문을 다루고 그 속에서 유익을 맛보는 인류는 한편으론 학문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WHY? 학문은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학문을 한다고 하면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밝혀 줄 것이란 희망 속에 산다. 그리고 그런 생각 속에 다른 것들을 도외시하고 잘 돌아보지 않게 된다. 내가 하는, 내가 주장하는, 내가 믿고 있는 이 개념, 학문은 절대적이니까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기서 적지 않은 위험요소들이 그 자신을 거꾸로 고립시키기도 한다. 많이 공부할수록 똑똑해지지만, 동시에 여러 위험도 생겨난다.
인간의 'Mind'와 '학문學問'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화두를 던지는가?
수 많은 학문을 접하게 되고 실용성을 이끌어 내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함을 인지하여 즉 '내려놓음下心'으로 절대성을 내려놓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태도Attitude'로부터 비롯되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므로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케 하려면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받아들이게 되면 지식의 본질, 실체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 가능하다. 지식을 학學하기 전에 지식의 본질, 실체를 알아야 실용성에 대한 유의미하고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이는 '절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공부의 첫 순서, 첫 단추다.
by T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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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리의 삶은 우리가 내린 의사결정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한 삶의 필수조건은 '올바른 의사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가장 필요한 능력은 '분별력'이다. 이번 수업은 바로 이 '분별력'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든 간에(대화, 독서, 경영 등) 주로 분별할 대상은 바로 '언어'이다. 우리 삶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속성을 잘 아는 것은 분별력을 키우는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핵심 속성은 '상대성'에 있다.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점은 언어의 큰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하는데 어떤 부분이 장점이 되고 또 어떤 부분이 단점이 되는지 그 포인트를 잘 아는 것이 분별력의 핵심이다.
언어의 상대성은 어떠한 현상이든 물질이든 '구별' 짓게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커다란 유용성을 준다. '약속'함으로써 소통이 더 원활히 되고, '구별'지음으로써 한 상황을 여러 관점으로 유연하게 볼 수 있게 해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학문의 근본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을 심리학적 관점, 물리학적 관점, 신학적 관점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점과, 학문은 발전할수록 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난다는 것도 언어의 상대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학문을 하는 이유는, 진정한 진실 혹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라기 보다 실용적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역으로 언어의 상대성으로 인해 인간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첫째로 언어는 '무엇'을 가르키는 역할을 할 뿐이지 '무엇' 자체가 될 수 없다. 즉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언어를 실재라고 착각하면 분별에 큰 타격이 갈 수밖에 없다. 둘째로 언어의 '구별'로 인해 우리는 일체감을 느끼지 못한다. 실제로 학문이 하나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별개라고 생각한다거나 인간의 삶을 경제적 측면, 정신적 측면, 관계적 측면으로 각각 따로 놓고 보게 되면 이 역시 무언가를 분별함에 있어 치명적이다.
언어는 매우 유용한 동시에 매우 위험하다. 따라서 어디까지 언어가 도움이 되고 어디서부터 위험한지 잘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모르면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분별하지 못하면 의사결정에 악영향을 끼치고 결국 삶이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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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통섭의 시대다, 통섭형 인재가 살아남는다 등 지금 '통섭'이 어딜 가나 화두이다. 사회 문제가 많아지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는 것과 통섭의 중요성의 대두는 연관이 깊어 보인다.
만약 내가 심리학과에 진학했다면 정말 심리학만을 파고, 광고학과에 가면 광고만 공부해 그것의 전문가가 되는 게 옳고, 또 당연한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학문의 근본을 조금이라도 접한 지금, 내가 전에 했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한 분야만을 고집해서 전문가가 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전문가'가 아닐 것이다. 관점이 치우쳐져 있고, 지식의 기반이 부실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심리를 알며, 창의적인 광고는 어떻게 만들겠는가?
하지만 '자각 강의'에서 말했던 대로 지금 대학과 사회는 학문의 본질을 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학문들 사이에 멋대로 그어져 있는 선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이과로 선을 그어버리고 문과생들에게는 수학, 과학을, 이과생들에게는 사회, 역사를 접하거나 깊이 공부할 기회를 앗아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다. 이건 마치 세상을 보는 시야 중 반을 검은 천으로 덮어버리는 일과 같다. 그런 식으로 교육받고, 사회경험을 하면 나도 모르게 세상을 조그마한 구멍으로만 보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편협한 시야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사결정'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지식의 범위가 넓지 않고, 세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과 같은 인재가 많이 나올 수 있었다. 현대는 학문이 너무 세분화되어서 감히 다른 분야를 넘나들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분명 창의성은 다른 것을 한 데 묶어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때 나온다. 여기서 나온 창의성으로 개인이 직면한, 이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다. 시대가 발전한 만큼 문제들은 굉장히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원래 모든 것은 하나다. 학문도 하나로부터 나온 것이다. 본디 하나였던 세계를 유용하게 써먹고자 임의로 '구분'지었는데, 우리는 세상이 정말 그렇게 나뉘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알고 착각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봐야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를 알고'인데, 이는 통섭으로 가는 시작이 '언어의 속성'을 아는 것임을 뜻한다. '지식의 세분화'와 '언어의 상대성'이 맞물리면서 우리가 점점 통섭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그 원인을 인식하고,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에 있다.('언어'라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수업에서 통섭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학문은 '양자정보이론', '복잡계 이론', '카오스이론' 등이라고 소개하셨는데 과연 이 이론들이 정말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지, 통섭의 본질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고 빨리 접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지금으로써는 내가 접할 생각도 못 했던 학문의 분야를 접하고 있는 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는 없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서로 배우고 협업해 시너지를 내고 싶다. 그 시너지가 궁극적으로 사회의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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