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의 출현으로 직면하게 된 이성의 한계

팟캐스트 '과학이 빛나는 밤에' 양자물리학 혁명 1~6편 후기



라플라스의 악마가 정말로 현재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면,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 또한 다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은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정확한 고리를 안다면 그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고전 물리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양자물리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과학은, 근대과학 혁명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만감에 도취되어있었다. 하지만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에서 기존의 인과론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속속들이 나오면서 고전 물리학의 바닥은 한순간에, 그리고 완전히 드러나버렸다.


미시세계에서 원인 없는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를 거의 절대시 하다시피 한 기존의 과학자들의 멘탈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미시세계에서는 정확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고 모호하게 확률적인 관계만이 존재했다. 마치 스케치할 때 희미한 선을 여러 번 그어야 그것이 어떤 것을 그린 건지 인지하듯이 원자 자체로는 모호하지만 확률적으로 봤을 때 비로소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물리학은 역시 말이 안되는 것 같은 '파동함수'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양자물리학, 그 중심에 있는 '이중슬릿 실험'은 최대의 수수께끼를 남겼다. '한 개의 입자로 관측되는 전자가 왜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빠져나갔을까?' 이는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괴상한 현상이다. 이 실험을 접한 과학자들은 '아니, 빛은 입자도로, 파동으로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아직 받아들이기 버거운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하며 단체로 당황하게 된다. 여기에 기존의 사고로 정확한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은 코펜하겐 해석, 다세계 해석, 파일럿 해석 등 이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을 붙이게 된다.


양자역학에서 '관측'이라는 행위는 이 이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는 그동안 관측한다는 행위가 우리(또는 검측기)가 어디에 위치해있든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면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될 거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관측 대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관측한다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관측은 대상에 힘이 상호작용하도록 한 다음 그 영향을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핸드폰을 관찰할 수 있는 이유도 빛이 핸드폰에 닿아 그것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눈에 도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 이론 안에 '불확정성 원리'가 있음을 밝히는데, 이 또한 관측의 한계로 인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알려주게 된다. 관측의 한계상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할 수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전자를 정확히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관측하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이로 인한 불확실성을 절대 피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당연히 미시세계를 온전하게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가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결국 편리한 해석을 현시점의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코펜하겐 해석'이다.


양자물리학은 그 출현을 통해 '우리가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성의 끝을 보도록 만들었다. 논리적으로, 인과론적으로, 선형적으로 존재할 것만 같았던 세상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비선형적임을 보여준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과학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점점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더 잘 알기 위해 과학이 발전하고 있는게 아닐까? 결국, 양자물리학은 과학이 이성의 끝을 지나 인간의 의식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우리는 '의식'이라는 또 다른 숙제 앞에 와있게 됐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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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지만 거대한 양자(quantum)의 세계

BU_class 2014. 6. 20. 10:30

팟캐스트 '과학이 빛나는 밤에' 양자물리학 혁명 1~6편 후기 

애매모호한데 거대한 양자(quantum)의 세계 - '이해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양자물리학의 등장이 '혁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학계의 '자만심'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태도' 자체를 뒤흔들었다. 양자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갈릴레이-뉴턴의 고전 물리학계는 합리적인 인간의 사고로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날이 머지 았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기의 수학자였던 라플라스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라는 무서운 말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뉴턴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오류라고 치부해서 무시하고 있었던 일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점차로 드러나기 시작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더 이상 오류가 아닌 어떤 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자만심으로 가득한 과학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채복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써 '양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에너지'라는 것은 인과관계가 뚜렷한 선형적 존재가 아니라 아주 미시세계로 들어가 보면, 뚝뚝 끊어져 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존재라는 비선형적인 세계관이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양자'라는 개념으로,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원인이 없이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들이 설명이 되었다. 


수소 원자의 확률적인 구조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지성의 진검승부부터,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인 "전자는 입자이고 파동이다?",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 이론', 벨의 정리 등등,, 백 년이 넘도록, 특정 원인으로부터 추론이 되지 않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곳저곳에서, 물리학 뿐만 아니라 뇌과학, 심리학, 철학에 이르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 애매모호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내놓고 있다. 우리가 그 기작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마음'과 '역학'을 연결시키는 이론까지 등장했다. 


'과학'이 마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학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던 '마음'을 과학의 끝판왕인 '물리학'과 연결시키다니,, 숨은 변수 이론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뭔가 그 뒤에 거대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주었다.


양자물리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땐 마냥 신기하고 재밌는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해'를 해보려고 상상도 해보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찾아보기도 했지만 점점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히 불가능해서, 내가 왜 이걸 이해해야돼? 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파인만이, "양자역학에 대해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다는 말을 보고 처음엔, '왜? 이에 대해 설명하는 과학자들은?'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알고보면 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하아,,,,,,,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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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혁명전야, 소박한과학의 거대한 힘>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자연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16-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 이전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혁명'이라고 명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시기에, 과학을 하는 방법 자체가 크게 뒤집어진 것이 그 이유다. 단지 시적으로 표현되고, 명확한 기준이 없어 반박할만한 기준조차도 없었던 고대 과학은 그저 제자리에서 맴도는, 각자의 생각을 내놓는 정도로 끝날 수밖에 없는 학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현상을 관측하고 이를 '수식'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객관성이 확보되는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또한 기존에 정리되었던 이론의 오류를 찾고, 그에 대응하는 또 다른 이론을 내놓으면서 차곡차곡 쌓여 발전 가능한 학문의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 동기는 다름 아닌 '혼란'. 수많은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고, 기존의 권위주의의 기독교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 혼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은 이러한 혼란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혁명'을 통해 도약을 꾀했다. 과학자들은 이런 지식들을 좀 더 실용적인 측면, 즉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측면으로 발전시킨 '완화된 회의론'으로부터 근대과학을 일구기 시작했다.


과학의 정의는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을 간단한 원칙에 의해 설명하는 학문'이다. 과학은 아주 소박하고 간단하면서도, 자연의 기본 원리를 밝히기에 아주 적절하고 실용적인 학문이 된다.


 

<2편. 천문학혁명, 집념과 인내의 승리>



기존의 권위가 깨지는 과정 중 첫 번째 혁명은 천문학 혁명이었다. 집요하고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과거의 '천동설'이라는 우주의 운동론를 '지동설'로 뒤집어엎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고 그렇게 설명을 해보려니 아무래도 관측 결과가 이상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이어받고, 티코브라헤의 치밀한 관측 결과를 토대로, 또 다른 과학자 캐플러에 의해 지구는 심지어 '타원형'으로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집요하고 정확한 관측'이 과학혁명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로써 '하늘이 등속 원운동을 하며 지구 주위를 돌고있다'라는 엄청나 보였던 주장이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로 전락해버렸다.



<3편. 역학혁명, 강력한 사고의 힘>


'집요한 과학자'들에 의해 천문학 혁명이 일어났다면, '도대체 지구는 왜, 어떻게 태양 주위를 타원형으로 도는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는 '사색하는 과학자들' 이 밝혀냈다. 역학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갈릴레이의 '관성'이라는 개념, 그 위에 세워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우주가 움직이고 있는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정확하고 깨끗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초속 3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공전하고 있는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왜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멀쩡히 땅 위에 서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는가. 또, 하늘을 엄청난 속도로 가로지르는 비행기 안에서는 그 속도를 못 느끼고 역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엄청난 속도를 느낄 수 있는 때는 지구가 갑자기 멈췄을 때, 비행이가 멈췄을 때, 즉 '변화'가 일어날 때여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왜, 어떻게 그런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정리해 내는 강력한 사고의 힘 덕택에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4편. 문명들의 협동=과학혁명?>


집요함과 정확함, 사색하는 힘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전 세계에 어느 시대에서 있게 마련인데, 어쩌다, 왜, 16-17세기에, 하필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시작된 것인가?


근대과학혁명은 갖가지 요인이 한꺼번에 모여 생긴 폭발적인 지적 발전이다. 이 폭발적인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위해 일어났던 갖가지 지식의 발전, 신념 등 여러 요인 중 하나의 요소만 빠졌어도 같은 형태의 과학혁명은 없었을 수도 있다. 중국의 재지술, 인쇄술, 철강산업, 인도의 수학, 유럽의 박해를 피 해다니던 그리스 과학자들의 갖가지 이론들, 이러한 지식들을 보존하고 유럽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준 중동지역, 자연의 법칙을 밝히려는 유럽인들의 기독교적 신념과 열망... 혁명이 일어나야 할 그때 모든 노력들이 한꺼번에 모여 터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며 진심을 다해 살아간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내 눈앞에서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목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우주의 티끌만큼도 안되는 존재라 참 쓸모없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큰 오산이다. 우리는 우주 자체다. 자기 자신으로 충실히 사는 것,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가는 것 자체가 우주의 목표를 향해가는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정말 신비롭고 아름답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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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빛밤 근대과학혁명 3편 _ 역학 혁명, 강력한 사고의 힘]


과학혁명의 중심은 물리학의 혁명이고, 물리학 혁명의 핵심은 역학 혁명이다. 물론 혁명의 시작은 천문학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천문학이라는 분야도 결국 물체의 운동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역학이 더 중요한 요소이다. 역학은 천문학 혁명 중 새로 발견된 사실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발전됐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할 때 어떻게 도는가? 왜 도는가? 왜 인간은 지구가 도는 걸 느끼지 못하는가?’ 등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물리학자들이 이 질문의 답을 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사고의 힘’이 빛을 발했다.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어떻게 도는가?’에 대한 답 발견한다. 만유인력은 물체들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을 말하는데, 만약 공기의 마찰이 없다면 만유인력으로 인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뱅글 뱅글 계속해서 돌 수 있다. 마찰이 없다면 지구가 공전하는데 한 번 운동을 하고 난 후 그 운동 상태를 유지할 에너지가 필요 없고, 만유인력 덕에 지구와 태양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이 이 현상을 설명해내는 데에는 ‘관성’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낸 갈릴레이의 공이 컸다. 엄밀히 말하면 갈릴레이의 ‘사고의 힘’이 큰 힘이 된 것이다.


만유인력으로 왜 공전 궤도가 타원형인가 하는 의문도 풀린다. 태양이 워낙 질량이 크기 때문에 태양 주위를 돌게 하지만 지구 자체도 질량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서 지구 나름대로 태양을 끌어당기고 있다. 때문에 공전 중심이 지구 쪽으로 살짝 쏠려 궤도가 완벽한 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지구가 태양 주위를 총알 속도보다 더 빠르게 도는데 왜 인간은 그걸 전혀 느끼지 못할까?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 속도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가 진공 상태인 고요한 우주 속에서 돌기 때문에 더더욱 느끼지 못한다. 다행히 운동 상태와 물체는 무관하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는 이 순간 우리는 찌그러지지 않는다. 지구가 공전한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공전하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전부 동시에 같이 움직이므로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공전을 느끼지 못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물리학의 혁명의 핵심은 순수한 사고의 힘이다. 이게 바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사고의 힘이 중요하고 또 무서운 이유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현상을 넘어 가상의 상황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실험해서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눈에 절대 보이지 않는 ‘관성’을 밝혀내 천문학, 물리학의 비밀을 풀듯이 말이다.






[과빛밤 근대과학혁명 4편 _ 문명들의 협동 = 과학혁명?]


과학혁명이 하필이면 16, 17세기에, 그리고 유럽에서 일어난 이유가 따로 있을까? 그게 맞다면 그렇게 만든 중요 포인트들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기 유럽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하나씩 얻을 수 있다.


유럽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다국가 체제였다. 오스만투르크가 독주하는 중동 지역, 중국이 독주하는 동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가 경쟁을 통해 비등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항해를 통해 식민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항해를 더 정밀하게 하기 위해 천문학이 크게 발달했다. 서로 경쟁하는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과학의 발전'이 힘 겨루기의 큰 변수가 됐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다국가 체제가 유럽의 과학을 자연스럽게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의 중인 계급 성장 또한 과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유럽의 중인 계급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었다. 나라를 뒤바꾸는 시민혁명, 명예혁명 등을 일으킬 만큼 말이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인 계급의 사람들은 생업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과학 지식을 연구하는데 집중했다. 갈릴레이도 이들에게 배울 만큼 측정과 계산에 있어서 뛰어났다. 이들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마인드가 과학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더 발달하게 만드는 추진력이 된 것이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 사실도 과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기독교에선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적이었던 과학자들은 신이 설계한 이 세상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그들의 신성한 임무라 생각해 더 열정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 지식인 계층이 거의 유교 사상에 빠져있었는데, 유교에서는 절대적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세상의 질서를 밝히는 일에 큰 동기를 갖지 못했다.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신한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눈으로 밝혀내고 해석하는 게 어찌 보면 아이러니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신화적이고 추상적으로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탈레스, 데모크리스토스 등 밀레투스 지방의 자연철학자들은 신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직접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이론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학문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이런 경향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에게도 이어졌고 과학이 발전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신이 만든 세상을 설명하지만,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이론들을 이단으로 몰고 비난한다. 그래서 이런 지식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중동 지방으로 피신을 간다. 다행히 중동 지방에서는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수학 이론들, 중국의 제지, 인쇄 기술을 들여와 후원하기까지 해서 과학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는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하나의 변수라도 빠졌다면 과연 과학혁명은 일어났을까? 물론 진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조합해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될만한 사건들, 배경들을 찾아보고 그것이 만들어낸 임계의 순간들을 보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세상이 어떠한지 알아가는 재미를 알았다. 하지만 시작 단계에 있었기에 과학을 통해 우주의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현대과학에 들어서 제대로 깨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이해한 시점까지 왔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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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빛밤 근대과학혁명 1편 _ 혁명 전야, 소박한 과학의 거대한 힘]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과학혁명'은 '전통과학'과 '근대과학'을 나누는 기준선이다. 과연 그 시기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특별한 발견이 과학의 전환점이 됐을까?


전통과학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리스트텔리스다. 그의 우주론은 4원소를 기초로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 ‘불은 가볍기 때문에 하늘로 가려는 성질이 있다’라는 식의 설명은 형이상학적이어서 객관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허점을 지닌다.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그리스의 고전들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과학혁명이 발발했다. 그리스 고전의 유입은 지식의 홍수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지식의 위기를 뜻했다.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들을 읽고 몰랐던 지식들을 알게 되면서 중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적 지식이, 그리고 그것의 바탕이 됐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과학사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지적으로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동시에 ‘도대체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적 혼란 중 ‘인간은 절대적인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회의론이 등장한다. 인간의 감각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는 지식들이 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지식이 생겨나면서 항상 회의론은 반복적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16, 17세기에서는 그저 반복에서 끝나지 않고, ‘혁명’이라는 과정을 밟아 전통과학이 근대과학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든다.


대표적으로 2가지 주장이 있었다. 하나는 데카르트의 주장인데, 그는 회의론의 바닥까지 경험하면서 내가 생각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기에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명확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이 생각을 발전시켜 우주에 대한 아주 거대한 체계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완화된 회의론’이다. '모든 지식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니고, 현실에서 쓰이는 지식은 유의미하다는마치 실생활에서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은 이 중 ‘완화된 회의론’을 배경으로 싹을 트게 된다.


근대과학의 가장 큰 특징은 ‘검증 가능함’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과학의 사전적 정의도 이 부분을 명시한다. ‘과학이란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을 간단한 원칙으로 설명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알 수 없는 우주의 본질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만을 설명할 뿐이다. 뉴턴이 대표적이다. 그는 수식을 통해 물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 만유인력이 본질적으로 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못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근대과학을 통해서 검증할 수 있는 부분만을 연구했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 단단한 기반 위해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과학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검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 고대 그리스 과학 그리고, 종교가 과학과는 달리 정체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빛밤 근대과학혁명 2편 _ 천문학 혁명, 집념과 인내의 승리]


과학혁명에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가 붙었다는 건 과학사에서 기존의 지식과 권위가 무너지는 과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이번 시간에선 천문학과 관련해 기존의 어떤 과학 지식이 깨지게 되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과학관은 종교가 지배했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볼 때, 지구는 신이 만든 것이 때문에 우주의 중심에 있어야 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일치하는데, 지구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게 당연했다. 이 지식은 당시엔 상식이자 진리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많은 항해가 이루어지면서 어두운 밤에는 별의 위치를 통해 배의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때문에 ‘관찰’이라는 행위가 매우 정교해진다. 여기서 ‘관측’이라는 잣대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들이댔을 때, 그의 생각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바로 이 점을 통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적 우주관에서 천상의 운동은 지상의 운동과는 달리 완벽해야 한다. 따라서 천상의 운동은 등속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관측하면 행성은 비틀거리며 원운동을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전원이라는 인위적인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기존에 생각하던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완전히 바꿔놓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이 간단한 발상만으로 주전원이라는 개념 없이 원운동만으로 행성의 움직임이 왜 지그재그였는지 설명이 됐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이 지동설도 기존의 권위와 세계관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동설도 등속원운동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해져 온 영원성, 완벽성을 상징하는 우주관을 의심하진 못한 것이다. 원래 행성들은 약간 일그러진 타원으로 돈다. 따라서 등속운동으로 설명하면 맞지 않는다. 이 사실은 16년에 걸친 케플러의 집념 어린 관찰에 의해 밝혀진다.


당시는 르네상스 시기였기 때문에 고대의 지식들이 유럽에 많이 유입됐다. 과학자들은 그중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가 수식과 기하학에 의한 단순성을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즉, 이왕이면 간단하고 깔끔하게 설명하는 게 더 좋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주전원이라는 인위적인 개념이 곁들어진 천동설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학계에서도, 사회적으로도 더 타당하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해서 케플러에 의해 절대적인 진리일 것만 같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깨지게 된다. 마침내 더 실체에 가까운 우주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분명 천문학의 혁명은 맞다. 하지만 과학혁명 그 자체라고 보긴 힘들다. 왜냐하면 왜 행성이 타원 궤도로 도는지, 왜 운동이 멈추지 않는지 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천문학보다는 물리학의 발전을 통해서 해결되는 부분이다. 천체의 운동은 결국 물체의 운동이기 때문에. 하지만 천문학의 혁명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물리학의 혁명 그리고 과학의 혁명을 일으킨 시발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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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대 거짓>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이 '빅뱅'이라는 이론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정말 우주의 근원은 무엇일까? 과빛밤을 통해 여전히 주류로 인정되는 빅뱅이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물질이 어떤 구성요소로 만들어지며 어떠한 힘이 작용하여 우주가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빅뱅. 137억 년 전 빅뱅에서 생겨난 것은 물질이다. 모든 것을 이루는 물질은 그 때 일어났다. 우리는 빅뱅 그 자체이다. 지금 이 순간에 빅뱅의 흔적을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빅뱅은 137억 년 전에 시작됐다. 왜 137억 년일까? 왜 이러한 특정한 숫자가 나왔을까? 100년 전엔 빅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 당시 과학자들은 그냥 우주는 무한한 과거에서부터 있어왔던 것이지, 특정한 순간 폭발에 의해 우주가 생겨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윈 허블이라는 과학자가 하늘의 얼룩이 가스 덩어리가 아니라 '다른 은하'의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 은하 말고도 수많은 은하가 있음을 알아낸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우주의 크기가 엄청 크고, 모든 은하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 또한 밝혀냈다.(도플러 효과)


역으로 생각하면 은하들이 원래는 하나의 점과 같이 가까이 있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발견으로 인해 '빅뱅'이론이 점점 주류로 자리 잡아가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하지만 '우주배경복사'라는 현상의 발견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빅뱅'이론이 주류가 되었다.


우주배경복사란 우주공간이라는 배경에 복사(열기)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기가 우주 어디에서든지 똑같다. 즉 우주가 똑같은 온도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그러한 열기가 별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주공간 자체의 열기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왜 우주공간이 똑같은 열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폭발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우주가 원래는 작았고, 그러한 우주가 굉장한 열기를 가지고 폭발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열기가 우주가 커지면서 퍼졌다. 그것을 '우주배경복사'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빅뱅은 주류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빅뱅이론이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중력, 전자기력과 같은 상호작용 시스템을 완벽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미지. 우주배경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


한편 '물질'이 빅뱅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을까? 물질이 어떻게 한 점에서 생겨났을까? 이 질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실험이 있다. 바로 입자가속기(입자를 가속하는 것) 실험이다. 입자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돌리면서 입자를 충돌 시킨다. 그러면 그것으로부터 입자들이 생겨 난다. 에너지가 물질로 전환된 것이다.(E=MC^2) 이러한 현상을 입자가속기로부터 실제로 관찰할 수 있다. 에너지가 빅뱅의 한 점에 있었고, 폭발을 하면서 에너지가 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의 성질에 의하여 여전히 의문점들이 많이 남아있다.('에너지'에 대한 정의 - 에너지는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하는 능력) 에너지는 혼자서 공중에 혼자 떠 있을 수 없다. 에너지라는 것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빅뱅 때는 혼자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뱅 당시 에너지가 존재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에너지가 물질로 전환되면서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들을 만들어 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37억 년 전 물질로 전환된 에너지. 에너지는 줄어들거나 증가하지 않는다. 빅뱅 때의 에너지의 흐름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에너지의 보존 법칙) 빅뱅 때의 에너지의 흐름이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빅뱅의 폭발의 흐름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물질들이 생겨났고 어떤 상호작용들이 구체적으로 빅뱅 당시 결정되었을까? 양성자, 중성자, 전자. 이것들이 모여 원자가 되는데, 이는 우리의 모든 것들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단위이다. 원자의 종류는 100가지가 넘는데, 그것이 저 3가지로 인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합되는 요소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복잡해 보이지만 원자는 사실 세 가지 입자가 블록을 조립하듯이 만들어내는 것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원자를 만들어나갈까? 양성자, 중성자가 서로 결합하여 원자핵을 이룬다. 그리고 전자는 원자핵 주변을 떠돈다. 그것이 원자가 된다.


전자가 원자핵을 떠돈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전자를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전자를 끌어당기는 것은 양성자이다. 양성자는 전기적 힘을 가지고 있다.(양성자는 +극, 전자는 -극) 그런데 원자핵에는 +극인 양성자들이 모여 있다. 여기서 양성자들은 서로 같은 극이니까 밀어낼 텐데 어떻게 원자 안에 같이 모여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 새로운 상호 작용의 등장하는데, 그것은 전자기력의 100배나 되는 힘인 강력이다. 강력에 의해 양성자와 양성자가 딱 붙게 된다. 강력은 원자핵 안에서만 작용한다. 강력이 원자를 존재하도록 하는 강력한 역할을 한다. 강력이 있으므로 해서 다양한 원소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력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아주 짧다(좁다).


한편 전자기력도 원자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기력 서로 같은 극끼리 밀어내고 다른 극끼리 밀어낸다. 여기서 만약 끌어당기는 힘이 약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전자가 날아가 버려서 이온이 된다. 화학반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이다. 전자가 원자핵 안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체 자체가 화학반응 덩어리다. 만약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세다고 하면, 전자가 또 원자핵에 너무나 들러붙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화학반응에 영향을 미친다. 힘의 세기와 그에 따른 상호작용이 적당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미세조정 - 조금이라도 힘이 달라진다면 세상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정확한 세기로 힘의 상호작용이 존재하고 왜 +,-극이 존재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힘의 균형이 있어 원자가 구성되고 물질이 형성된다.


by Elizabeth Taylo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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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빛밤 시공간 결정론의 결정체 2편 _ 문제이자 해답인 빛
* 과빛밤 시공간 결정론의 결정체 3편 _ 상대성의 탄생, 광속불변 이유



무엇이든 운동하는 물체와 같은 속도로 달리면 그 물체는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지만 ‘빛’은 예외다. 실제 빛의 속도는 진공 상태에서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향에서 측정하든 항상 같은 값을 가진다. 따라서 빛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멀어진다.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이 부분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는 불변해야만 한다는 신념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맥스웰과 관련이 깊다.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이 하나의 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방정식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전자기파(파동)가 나아가는 속도가 빛의 속도와 일치하는 것이 밝혀졌고, 빛이 곧 전자기 파동임이 드러나게 됐다. 근데 빛은 매우 빠르기 때문에 파동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우 딱딱한 상태의 매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주는 텅 빈 진공이다. 이 부분 역시 기존의 물리학으로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빛을 본다면, 빛은 더 이상 출렁이는 파동이 아니고 멈춰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맥스웰의 방정식 상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방정식이 분명 맞으며, 이 공식은 우주 어디서나 같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확장시켜 '광속은 불변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아인슈타인은 빛에는 속도가 더해지지 않는다는 것과, 빛의 속도는 불변한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사고하다가 속도의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 과정 중 속도 개념이 수정되었고,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속도 = 거리/시간’ 이 공식을 ‘광속은 불변하다’에 맞게 활용하면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공을 위로 던져서 받을 때, 기차 안에서 공을 받는 사람이 보는 공의 움직임과 정류장에 있는 사람이 보는 공의 움직임은 다르다. 전자 입장에선 운동상태가 똑같게 보인다. 공은 그대로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떨어진다. 하지만 후자 입장에선 기차는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공을 던진 위치와 받는 위치가 달라보이게 된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말이다. 공은 똑같이 움직였지만 운동상태가 다르게 측정된 것이다.


밖의 정류장에서 관측한 사람이 측정한 운동상태에서는 공이 더 많은 거리를 움직이고, 더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인 것으로 측정된다. 예를 들어 멈춰있을 때는 1초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만, 움직이고 있을 때는 1.2초 동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즉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측정되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보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맞다. 어느 쪽 측정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측정값이 관측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는 곧 상대성을 뜻하며, 절대적인 기준이 없음을 보여준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우주의 시간이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을 똑같게 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이는 실제로 측정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이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 '광속 불변'. 이 내용들은 시간과 공간의 큰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들이 되었다. 그 비밀은 바로, '시공간 결정론의 결정체 1편'에서 언급된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얼어붙어 있는 시공간 결정체'라는 것이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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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빛밤 시공간 결정론의 결정체 1편 _ 과거, 현재, 미래는 한 덩어리
* 과빛밤 시공간 결정론의 결정체 4편 _ 시공간 결정체 느껴보기



상대성 이론의 등장으로 인해, ‘시공간’과 ‘결정론’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만들어졌다. 기존의 물리학계에서는 시공간이 연극의 배경에 불과한 거라고 봤다. 연극은 배경과 주인공이 분리될 수 있고, 배우는 즉흥적으로 연기할 수 있다. 또한 공간적 한계상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등장으로 시공간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고, 시공간을 영화의 배경에 비유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배경과 주인공을 분리할 수 없다. 또한 어떤 장면이 뒤이어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영화 필름은 쫙 펼치면 그 속엔 영화의 모든 장면, 시간이 담겨져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단 한 큐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미 시공간 상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상대성 이론이 가르키는 바이다.




그럼 왜 이미 완성된 필름 한 통인 시공간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바로, 필름이 ‘재생’되기 때문이다. 근데 재생된다는 것이 곧 시공간이 흘러간다거나, 미래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오로지 재생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느 부분이 먼저 읽히느냐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다. 시공간은 얼어붙은 강처럼 하나의 덩어리이자 결정체이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끈질긴 환영일 뿐이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기차 한가운데에 승객이 있고, 기차 양 끝에서 동시에 승객을 향해 빛을 발사한다고 해보자. 그럼 상식적으로 빛이 동시에 도착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결과는 ‘동시에 도착한다’로 나온다. 당연히 왼쪽에서 오는 빛이 더 먼저 나오고, 오른쪽에서 오는 빛이 나중에 나와야지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탑승객이 아닌 밖의 정지해있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그렇다. 탑승객 입장에서 두 빛은 ‘동시’에 출발한 것이 맞다. 왜 다를까? 이는 운동 상태에 따라 ‘동시’의 기준이 바뀌기 때문이다. 시간 자체가 다르게 흐르면 그 기준 또한 달라진다.


만약 기차 양쪽에서 빛이 4초 만에 가운데로 도달해야 한다고 했을 때, 왼쪽은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밖에서 정지 상태일 때는 8초가 흐른다면 기차 안에서는 시간 간격이 늘어나 4초가 되는 것이다. 오른쪽은 같은 원리로 시간이 빨라진다. 시간의 간격은 운동 상태에 따라 다 다르고, 다 옳다.


기차 속도가 빨라질수록, 극단적으로는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차이는 더 커진다. 이는 우리가 달리는 차 안에서 풍경을 볼 때도 느낄 수 있다. 풍경 중 움직이는 방향 쪽에 있는 것들은 빛이 빨리 도착하므로 현재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이고, 그 반대는 과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봤을 때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누군가에게 현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공간의 결정체 속에는 과거는 없어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다. 이동 속도만 빠르다면 언제든 현재에 있을 수 있게 된다. 다만 빛의 속도보다 아직 빠를 수는 없기 때문에 미래는 볼 수 없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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