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연 '생각 기술' 中

BU_etc.. 2014. 7. 2. 20:01



“모든 공부가 가정을 증명하는 방법일 뿐이고, 어떤 이론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학생들에게서 숨길 필요가 없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일찌감치 위대한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학자, 수학자 등의 이론을 직접 읽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 이론을 비평하고 자기의 이론을 써나가도록 지도했다. 

그 결과 이 당시의 어린이들은 지금의 어린이들보다 놀랄 만큼 방대한 지식을 가졌으며 벌써 10대 중반에 자기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개발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20대가 되면 당당한 학자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조승연 '생각 기술'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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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를 알면 학문의 실체가 보인다.

BU_class 2014. 6. 30. 20:25

'공리'를 알면 학문의 실체가 보인다.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후기



고대 그리스 이래 '수학'이라는 학문은 한 마디로 '완벽한 것', '영원불멸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완벽할 거라 기대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수학자들은 자체적으로 완전한 수학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 그것의 기준들과 방법들을 다른 지식 영역에도 적용하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인식론자들은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수학도 어딘가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고, 그 출발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즉 수학의 확실성을 의심한 것이다.


"수학은 과연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어쩌면 우연적인 요소들이나, 참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직관적인 사실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몸이 단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된 것처럼 수학 또한 단 하나의 명제로 시작했다. 그 '공리'가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실체를 알면 적잖이 놀랄 수 있다. 공리는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지만 올바른 것으로 가정하자는 암묵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약속'인 것이다. 그저 직관적인 앎을 토대로 '그냥' 자명해 보이니까 공리로 정하자고 한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만들어진 이후, 수학자들은 위의 사실을 인지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가 다른 곳에도 적용이 된 건 순전히 관습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때문에 자유롭게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공리를 선택해 또 다른 수학 이론을 구축해나갈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수학자 힐베르트는 그렇다면, 어떤 공리를 정해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수학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공리의 수를 최대한 줄여 직관에 의지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최대한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명제를 공리로 설정해 완전한 체계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최소한의' 공리, 그리고 '모순이 없는' 공리를 토대로 어떠한 수학적 사실이든 진위를 판정할 수 있는 수학 체계를 발견해보자!" 이것이 바로 힐베르트 계획의 핵심 목표였다.


그는 첫째로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고, 둘째로 어떤 것이든 참, 거짓을 판별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이론의 첫 시작이 직관적인 앎에 근거한 약속된 공리여도 온전한 수학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힐베르트는 수학적으로 핵심 이슈인 23개의 문제를 제시하고, 앞으로 만들 궁극의 수학 체계로 이 문제들의 참, 거짓을 가리고 풀어가자고 자신 있게 말했다.


과연 힐베르트가 꿈꾸는 완전한 수학 체계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 원대한 꿈은 젊은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괴델에 의해 허망한 꿈으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23개의 문제 중 첫 번째 문제는 칸토어가 주장한, '자연수와 실수 사이의 무한집합은 없다'는 '연속체가설'이었는데, 괴델은 1940년 이 가설이 현재의 집합론 안에서는 거짓이라고 판정할 수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게다가 1960년 수학자인 코헨 또한 이 가설이 참이라고 판정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결국 이 두 발견으로 인해 '연속체가설'이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가설임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결국 첫 번째 문제부터 어떠한 수학 체계 안에서 그 공리들이 모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음을 밝혀져 힐베르트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괴델은 제1불완전성 정리에서 특정 명제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순이 생겨버리는 '자기 언급의 패러독스'가 수학에서도 발견됨을 발견했다.


"수학에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포함된다."(제1정리)


아무리 적절해 보이는 공리로부터 이론을 구축한다 한들 반드시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명제를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정말 그렇다면 애초에 수학은 진위 판명을 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도구였던 것이다. 


제1정리의 내용으로부터 제2정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수학 이론에서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아래의 사실을 나타낸다.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다고 해도 스스로의 체계가 옳다고 증명하는 것을 그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제2정리)


이건 마치 검은 까마귀만을 여태껏 봐와서 '이 세상에는 검지 않은 까마귀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장이라도 흰색 까마귀가 등장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순을 찾지 않았다고 해서 모순이 없다고 확실할 수는 없다. 정리하면, 수학 내부에서 모순이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수학의 완전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동안의 수학자들의 깊은 신앙이었던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어떤 명제든 참인지, 거짓인지 반드시 알아낼 수 있다'는 환상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인간 이성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수학'이라는 가장 단단해보이는 학문을 대상으로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게 수학의 기본 틀을 무너뜨려 수학을 붕괴시킨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수학의 구조와 한계를 드러내 문제의 본질에 직면함으로써 오히려 더 진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학문들에도 적용되는 내용이다. 모든 학문은 공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그동안 학자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학문의 본질을 마주하게 됐다. 그래서 그들이 얻게 된 결론이 무엇일까? 학문의 완성도는 공리의 참, 거짓 여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 공리를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결과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학문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이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무시할 수 없는 학문의 '유용성' 때문이다. 학문은 절대로 진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지만,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실험하고, 검증하고 연구해 세상의 현상들을 잘 설명하고 풀이해준다. 우리는 학문을 일종의 도구로 여기고 최대한의 유용성을 뽑아낼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학문을 제대로 하기 전에 이런 인식론적인 공부가 선행되야 학문의 타당성과 유용성을 잘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학문하는 진정한 태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학문의 원리, 구조, 한계를 알고 특정 학문에 필요 이상의 중요성을 두지 않고, 또 세상을 각자의 입장에서 표현하는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 학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이성과 학문을 통해 굴러가는 이 세상 위에 올바르게 서있을 수 있게 된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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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상대성 이론을 해석하여 설명한 팟캐스트 '과학이 빛나는 밤에' 중 '시공간, 결정론의 결정체' 편을 듣고 아인슈타인이 직접 말하는 특수상대성 이론이 궁금해 참고해 봤다. 책 '철학적 사고로 읽는 과학의 원리' 제1장에 대해서는 모든 학문을 이야기기할 때 항상 고려해 봐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따로 후기를 쓰지 않고 '참고'해서 썼다.)


| 유클리드 기하학 vs 비유클리드 기하학

| 갈릴레이-뉴턴의 고전 상대성이론 vs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위 이론들의 '이름'을 보면 뒤에 있는 이론이 먼저 나온 이론을 부정하면서 나온 이론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세우게 된 계기를 살펴보았다.

아인슈타인을 깊은 생각의 늪에 빠지게 해준, 당시 화두로 떠오르던 두 개의 법칙이 있었다.


1. 명확하게 실험적으로 증명이 된 빛의 진행에 관한(언제 어디서나 빛의 속도는 동일하게 측정된다는) 법칙 

2. 실제로 정말 당연하게 인정되고 있었던 갈릴레이-뉴턴의 고전 상대성 원리


서로가 서로를 설명을 할 수가 없지만, 또 각자는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절대 물러날 수 없었던 이 두 법칙....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하는 비극적인 딜레마에 빠져있는 학계를 특수상대성이론이 두 가지 법칙을 모두 포용하면서 구해냈다. 이 대단해 보이는 이론은 도대체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책의 서문에서 독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설명의 단정함 따위는 재봉사와 구두수선공에게 맡기라는 이론물리학자인 볼츠만의 교훈에 따라, 말을 아끼고 우아하게 글을 쓰는 대신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강조할 것은 오히려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한 말이 무엇이었냐면,

"..여기까지 논의한 결과에 의하면 빛의 진행에 관한 법칙과 상대성 원리(고전 상대성원리를 말함)가 서로 모순인 듯 보이는 것은 증명되지 않은 '고전 역학의 두 가지 가정' 때문이다.", " '이 가정들' 을 포기한다면... 딜레마는 사라진다."


아인슈타인이 강조한, 두 법칙 간에 딜레마가 형성되는 이유는 바로 그 '증명되지 않은 두 가지 가정' 때문이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 그것이 바로 '공리'다. '고전역학'을 지탱해주던 공리. 그 공리를 포기하니 모순인 듯 보였던 두 법칙이 서로 연결하여 물리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되었다.


갈릴레이-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역학'은 " '시간' 이 지나는 동안 '공간'에서 물체의 '위치가 어떻게 변하는지' 설명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시간', '공간', '움직임'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를 어느 누가 생각해 보려고 했을까? 늘 우린 시간이 빨리 간다느니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만 그것에 대해 우리는 따로 정의 내려보지 않는다. 뭐,, 어차피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또 하나의 '공리'가 되고, 그건 결국 언어로 되어있는 학문의 한계이긴 하다. 하지만 결코 풀 수 없을 것 같이 보였던 딜레마를 한순간에 풀어내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사색의 괴물'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문장 하나하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단지 한 문장인데도, 음미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아직 반도 제대로 못 읽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놈의 뭔지도 모르는 '증명되지 않은 암묵적인 약속, 공리'를 붙들고 꼼짝 못하고 갇혀있으면 계속 풀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게 되지만, 그 공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하고 그 문제가, 언젠가는 한 번 내려놓아도 괜찮을 때가 오지 않을까, 그리고 실제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겠지! 하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1.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 놓고 믿고 있는 공리가 무엇이고 어디 박혀있는지 파악하는 것, 

2.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학문도 그 공리가 무엇인지까지 정확하게 파악해 보는 것

3. 더 큰 바탕으로 만들어 내는 것! 참,, 어렵다. 일단 아무것도 모르니 없는 셈 치고 다 공부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


by i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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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 정리>

보통 '학문' 그리고 '논리'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믿음'과 '신뢰'를 부여한다. 그리고 '완전성'이라는 헛된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과학과 수학이라는 분야에 더욱 완벽함이라는 오해를 갖는데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에 카운트펀치를 가한다. 이는 수학을 포함하여 일반 이론 체계 전체에 적용이 가능하며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낸 이론적 틀과 구조로는 결코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없고, 그것이 또한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



<공리1>

'모든 이론은 증명 불가능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공리를 통해 그것들을 조합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함으로 여러 법칙을 발견하는 기법을 이용. 그러나 1830년경 수학천재 가우스가 5번째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꾸어 넣었다. 이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의 공리가 서로에 반하는 것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자체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또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문의 이론체계는 '절대적 진리의 기술'이 아니다. 어느 일정 공리를 토대로 한 논리적 사고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100년 뒤 괴델은 불완전성정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공리를 선택하고 모순이 없어 보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자기의 그 틀안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리2>

'A=B, B=C라면 A=C이다.'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러니까, 성립된다고!'라는 비논리적인 부분에 의존한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패러독스는 논리조차 공리(암묵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행하는 논리적 사고란, 사실 '증명 불가능한 신념' 중 하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의심하는 어떤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by 데카르트. 근대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논리 1>

논리적 사고에는 반드시 비약과 모순이 있다. a=b : a와 b가 어떤 근거로 똑같다고 간주할까? 애당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가 'a=b이다. 그러니까...~다.'라는 것은 분명히 비약과 모순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논리적 사고의 정체이다.



<모순> 

누군가가 '그것은 모순이다!'라고 말했어도 그것은 단순히 자기가 만들고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도록 공리를 제멋대로 정한 것은 그 자신이니까. 만약 우리가 모순을 마추쳤을 때,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공리의 변경'이다.



<언어게임>

말이란 객관적인 근거에 따라 성립되지 않으며 전통적, 문화적으로 정해진 생활양식이라는 Rule을 근거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비트켄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이 정한 룰 안에서 스스로를 옳다고 하고 있으니까 결국 논리라는 것은 '자작연출'이다. '자작연출'



<이데아론>

'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삼각형'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도구주의>

도움이 되기만 하면 이론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는다.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도움 되는 지식인가 아닌가'이다.





인간은 어떤 기반 위에 사는가?

진실 위에 살아가는 존재일까?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암묵적 공리에 살아가는 존재인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은 우리 인간이 구축한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완전하나 우리 인간이 스펙트럼으로 비추어지고 건설한 사회는 결국 진리가 아닌 Mind로 이룩한 것이다. 고로, '공리'로부터 출발한 이 모든 것은 불완전함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나약함을 직면하라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절대적 상대성에 이해하고 겸허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이 관전 포인트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개념을 공리로부터 도출해내어 완전성의 믿음을 부여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절대적인 삼각형, 완벽하고 완전한 삼각형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보지 못했다. 여기서 본 적이 없음을 인정할 때, 다른 것에도 잡아떼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가 몸에서 우러나온다.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리적이다.'라는 말도 그저 우리가 만들어낸 생각의 방식에 한 약속이며, 일종의 게임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속에 들어있을 엄청난 수의 공리가 서로 얽히고 얽혀 생각의 방식을 규정짓는가.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특성 안에서 놀음하고 있지 않는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아름다움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


by T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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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있던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1장. '철학적인 무엇' 후기를 수정/보강했습니다.)


학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과 과정에 대해 공부하는 건 학문을 넓고 깊이 파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한다. 학문의 실체를 알아야 환상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 사실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반 대학에서는 이 내용에 대해 접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책의 1장은 대학을 대신해 우리가 기존에 갖은 학문에 대한 환상 또는 오해를 산산히 부시고, 이론이 무엇이고, 학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보게 만든다.


우리의 몸이 처음엔 단 하나의 세포로 시작해서 수많은 분열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처럼, 모든 학문도 단 하나의 명제에서 시작했다. 학문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명제가 ‘공리’인데, 공리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히 자명한 법칙’을 뜻한다.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증명할 수 없는데, 자명해 보이므로 공리로 하자고 ‘약속’한 것이다. 학문을 지탱하고 있는 최초의 기둥이 약속이라니! 누가 생각해도 학문의 기둥은 단단하고,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약속만 다시 하면 사과가 배로 불려도 상관없듯이 그 기둥은 실제로는 전혀 단단하지 않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기본 공리를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기하학은 매우 객관적이고, 정교하며 완전한 학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느 학문처럼 기하학을 만든 최초의 공리는 증명되지 않다. 따라서, 만약 공리에 오류가 있다면 기하학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학문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실제로 가우스가 기존의 평행선 공리를 '평행선도 교차한다'라는 공리로 바꿔 놓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었다. 이는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지만, 학문 안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모순’도 공리에 의해 존재하는 개념일뿐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관측된다. 상식적으로는 빛이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즉 말이 안되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위의 사실이 맞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는 한 모순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은 특정한 틀 속에 있을 때만 발견된다. 그리고 그 틀을 받치고 있는 건 약속으로 만들어진 공리이다.


    실재   |   공리   →   논리   →   정리   →   이론   →   학문


빛이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존재한다는 건 실제로 관측된 ‘실재’이다. 하지만 약속은 '실재'를 담아내는 게 아닌 인위적인 무엇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실재'보다 논리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약속으로 이루어진 공리, 그리고 공리로 이루어진 학문은 결국 위의 관측 결과를 담아낼 수 없는데, 바로 이 사실을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학문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의 세상은 진리 위에 기초한 게 아니라, 약속 위에서 세워졌다."


애당초 수학, 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시작을 보면 그 속엔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치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근거로 하나의 세계관이 구축된 것이다.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기껏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이다. 뉴턴의 방정식이 왜 그렇게 구성돼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용하게 쓰이기만 한다면 오케이다. 이렇게 학문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문해석학을 사이비 학문이라고 깎아내릴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이 학문을 공부해도 괜찮을까? 이게 정말 맞는가? 왜 이렇게 된다는 거지? 라는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기존의 관점과 다르고, 기존의 논리로 설명되지 못한다고 해서 학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게 아니다. 학문은 그 틀안에서 논리적으로 문제없는 결과들이 도출되기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떠한 학문도 '실재'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기에 특정 학문에 집할 필요도 없다. 자료가 논리적으로 오류 없이 배열되는 게 진실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그 틀 안에서만 진실할 뿐이다. 한쪽의 시각만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는 걸 증명한다는 건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지고, 자신이 만진 부위만을 코끼리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의 마인드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찾기 애쓴다는 걸 인식하고 마인드적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 우리는 학문을 대할 때, 그저 '도구주의적' 입장을 취하면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되는가, 즉 유용성에 따라 학문을 취할지 버릴지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언어로 인해 구분된 학문의 경계를 알고,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러 학문들을 통합할 수 있고, 거기서 나오는 유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생소하거나 쉽게 공부하지 못했던 학문도 두려움이나 이질감 없이 접할 수 있다. 사실 과학과 경제학은 나누어진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학자도 어디가 경계인지 말할 수 없다. 현재 보이는 경계는 단지 약속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 거기엔 근거가 없다. 이름이 붙여지는데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이론은 다면적인 현실의 특정한 한 측면을 보여줄 뿐이다.


유용성을 얻기 전에, 유용성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성 또한 알아야 한다. 학문할 때, 도움이 되는 부분까지만 취하는 걸 넘어서, 이것만이 맞다고 집착한다면 이는 부정확한 신념을 형성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편협한 사고는 또한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가둘 수있다. 하지만 이 역시 좁게는 학문이, 넓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 ‘실재’에는 약속을 토대로 만들어진 학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널렸는데, 그럴 때는 자신의 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학문이 실용적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게 사실이다.


학문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된 건지, 왜 경계가 생겼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학문하는 태도를 갖추게 만든다. 학자적 태도를 갖춘 사람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을 열린 태도로 검토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삶에서 일어나는 '실재'들, 예를 들면 인간관계, 소통, 결혼, 일 등을 경험할 때도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학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연구를 통해 굴러가는 이 세상 위에 올바르게 서있을 수 있는 힘이 된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

우리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재미가 없었고, 그 재미없는 공부를 '피상적' 혹은 '전략적'으로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도 가고 직장도 다닌다. 여전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기반 위에 쌓여만 가는 지식 아닌 지식으로 억지로 공부하고, 외우고, 시험보고 합격하고 잊어버리고 단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억지로 일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산다. '뭔가를 하나만 건드리면' 무너질게 뻔한데 그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 힘들게 힘들게 포장하고 또 포장해서 점점 자기가 만든 틀안에 갇혀 평생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뭔가 하나를 건드려서' 무너져보면 안 되는 것인가? 뭐가 두려워서 무너져보지 못하는 것인가? 왜 힘들게 힘들게 꽁꽁 감싸야만 하는 것인가?!


특정 단어에 대한 국어사전을 찾고 그 안의 단어를 찾고 또 찾다 보면 결국 처음 시작했던 그 단어로 돌아온다고 한다. 몇 단어만 찾고 찾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실체는 없고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의존적'인 관계로 버티고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상대적으로 설명이 될 뿐이며, 절대적인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이성, 언어로는 절대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


'뭔가 하나를 건드린다는 것'으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제까지 위태위태하게 쌓여있던 지식들과, 내가 경험했다고 말하는 일들, 내 생각이라 말하는 것들, 각 학분분야의 이론들, 과학 실험들, 권위 있다, 최고다 하는 사람들의 말들, 책들,,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그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무너지는 게 무엇인가? 본래 절대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져서 산산조각 날 것도 없다. 그저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 모두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그것들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허무함과 그와 동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속에서 모든 이론을 세우고 있었던 기하학, 가우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뒤집어엎었는데도 아무것도 무너진 것은 없었다. 그래, 이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언어로 표현된 학문, 이론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공부를 해야하는가? 언어는 절대로 진짜베기를 표현해 낼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글을 읽고 써야하는가? 하는 난관에 부닥쳤다.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냥 손 놓고 밥이나 먹으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무리 공부해도 진리를 알 수 없을 텐데 뭐 하러 공부를 해야 하는가? 그런데 뭐, 재밌는걸 어쩌겠는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찾아보지 않고는 못베기겠는데, 찾고 공부해야지 어쩌겠는가?


그래서 공부는 안 하겠다 정말 하기 싫었는데 그거 잘 됐네~! 한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하면 그만이다. 그저, 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해 엄청 열심히 공부해서 죄다 이해해 놓고 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안 좋아서 이런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긴 안다^^;), 다른 이론이 나타나 이 이론을 뒤집어 버렸을 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생길 뿐이다. (내가 완전 천재여야만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구축되어 있는 이론이 영 아닌것 같을 때, 아주 만약에, 내가 뒤집을 수 있을 때 무서워하지 않고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진리요, 나를 따르라' 하는 권위자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아주아주 조금 생길 뿐이다! (사실 아직 다 무서운 건 마찬가지긴 하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고 뒤집어질 때도 마땅히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게 가장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나만의 세상이 무너질 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발전의 길로 가는 가장 큰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BU멤버가 되면서부터, 공부하는 것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 나는 원래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타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혼자 타과 수업을 신청해 들었고, 그 과목들은 성적이 바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생명과 수업이라도 교수가 내는 과제가 엉터리면 남들 밤새면서 열두장씩 써내는 과제도 나는 수업 시작 15분 전에 달랑 세장 써내서 최하점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생물학도이니 여기에 집중해야만 하고, 공부를 할 거면 평생 생물학 공부만 해야 된다고 주입이 됐다. 남들은 전공 학점 채우고 성적 맞춘다고 재이수하고 점수 따기 쉬운 과목들을 열심히 찾아 듣고 있고, 취직을 하기 위한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난 내가 뒤처지고 있는 줄 알았다. 뭔가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의 공부는 더 이상 파낼 것도 없고 더 파낼 힘도 없는데,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그저 일상이 좌절이고 지침 그 차제였다. 그래서 더더욱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가 싫어졌다! 그런데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무엇이든 내가 생물학과를 나왔든, 아님 그냥 직장인이든, 아직 대학을 안 갔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세상에는 더 알고 싶고 재미있는 공부할 거리가 아주아주 많으며, 그걸 공부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된다는 걸 BU에서 점점 깨달아가고 있다.


by illy

posted by BU editor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수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론들, 모든 생각들의 기저에는 이 모두를 관통하는 근본 공리와 원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학위를 따도 근본 체계를 모르면 본질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삶은 의사결정에 이해 좌우되고, 의사결정은 분별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리고 분별력은 대게 '독해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저자나 강연자가 어떤 말을, 무슨 의미로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책을 읽고, 강연을 들어도 쓸모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독해력이 매우 약합니다. 독해력이 약하면, 지속적인 발전이 어렵고 해 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독해력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책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대강의 '감感'으로 책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해의 기본은 '감感'이 아니라, '해解'입니다. 저자, 강연자의 의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뒤이은 생각과 결론들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토론 교육이 거의 의미 없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라는 말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상식과 삶의 원리들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렇듯) 교육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공부하는 법_how to study'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 기관들은 공부하는 방법을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테크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지식하는 법'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켜 왔는지,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는 건전한 원리들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다지 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지적대로 우리가 가진 지식들 대부분이 '편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공학 서적을 읽는다면, 그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한 개인의 신념에 대해 듣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접한 정보가 원리가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보건대 책을 통해 습득한 정보들은 자신에게 불리해집니다.

독해력 없이는 분별력도 없습니다.

독해력을 단단히 다지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대로 배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posted by BU editor

어떤 이론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었다면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수학계의 거장 힐베르트는 '수학 이론에 모순은 일체 없고 어떤 문제라도 진위의 판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하고자 했지만 괴델이 '수학이론은 불완전하며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수학적으로 증명해 버렸다. 어떤 이론 체계에도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하고,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그 이론 체계 안에서 결코 증명할 수 없으며, 결국 자기 자신으로 완결하는 이론 체계는 구조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이다. 요컨대 수학이론에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포함되어 있고, 수학 이론에서 증명 불가능한 명제를 포함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체계가 옳다고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수학,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일정한 공리를 토대로 논리적으로 짜여 체계화된다. 어떤 이론 체계에도 반드시 처음에 공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올바르다고 하는 암묵적인 이해가 공리의 시작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리를 선택하고 모순이 없어 보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이론 체계에 모순이 없음을 자기 안에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선택한 공리가 정말 옳은지 증명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논리라는 것도 암묵적 이해에 의해 성립된다. 이것 또한 증명 불가능한 전제 중의 하나로 본질적으로 공리와 마찬가지이다. 논리도 약속, 공리도 약속이다. 뉴턴의 방정식에서 '중력은 물체 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라는 식을,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도 없는데 물리학의 기초로 삼고 있다. 

또한 '나는 인간이다'라는 얼핏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말조차, 객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 채 그것이 옳다고 하는 전통적, 문화적 룰에 의한 것이다. 어떤 말의 근거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조차 근거 없는 룰을 토대로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을 사용해 논리적으로 뭔가를 서술했다고 해도 그 올바름의 근거는 결국 '이건, 이래'라고 정한 것이다. 

결국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논리적이게 설명되었더라도 모든 이론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이론은 없다. 이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그나마 가질 수 있는 타당한 기준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인가 아닌가.' 뿐이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약속한 것을 배우는 것일 뿐 우리의 논리적 사고로 진리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다. 학문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실용성'에 있다.


by Miranda

posted by BU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