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펜듈럼에 해당되는 글 8건
- 2014.05.17 강요된 현실
- 2014.04.06 TED _ 자살 폭탄 테러를 가르치는 학교의 내면 Sharmeen Obaid Chinoy
- 2014.04.06 개인 브랜딩 = 트루셀프 + 전문성
- 2014.04.06 '학계를 떠나는 한 박사과정 학생의 뜨거운 질타'(뉴스페퍼민트 기사)
- 2014.04.06 펜듈럼과 대학
- 2014.04.06 리얼리티 트랜서핑 '펜듈럼'
- 2014.04.06 균형력 _ '리얼리티 트랜서핑'
- 2014.04.06 TED _ 실수로부터 학습하는 방법 Diana Laufenberg
글
사람들에게는 '강요된 대열'이 현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반드시 대열 안에 서야 한다는 규칙이 환상이다. 대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익숙하게 환상에 푹 젖은 채 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잘 흔들어서 깨워줘야 한다. 혹은 카를로스 카스타네다가 말하는 것처럼 연결점(육체와 에너지체가 연결되는 지점)을 변경시켜서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환상인지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펜듈럼의 규칙을 깨는 자는 리더가 되거나 변절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스타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 추방된 불량배가 된다. 앞사람은 펜듈럼의 규칙을 깨뜨릴 수 있는 완벽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믿었고, 뒷사람은 그것을 의심했다. 어느 쪽이 되느냐는 오직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펜듈럼과 맞서 싸우면 당신은 패한다. 펜듈럼과의 전투에서 당신은 언제나 패배를 맛볼 것이다. 싸우지 않고 대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 비법의 전부다. 가만히 빠져나와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펜듈럼에게 작별의 인사로 손을 흔들어줄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길을 향해가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을 대열로 몰아넣으려고 애를 쓰겠지만, 당신이 싸우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펜듈럼의 규칙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은 정말 숨 막힐 듯 황홀하고 놀라운 내면의 자유를 얻는다.
'트랜서핑의 비밀' 中 (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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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살테러 아이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나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가 되는 배경엔 탈레반의 교묘한 '교육' 술책이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집과 음식을 제공하며 그 대가로 자신들이 원하는 교육을 시킨다. 사실상 세뇌 과정이다. 이슬람의 책인 코란을 왜곡시켜 서구 세력과 관련한 모든 것을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다. 또 학대를 통해 세상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자살테러 후 사후세계에서의 영광에 대해 전하며 그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 영상을 접하니 자살테러 아이들이 오히려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가치관이 완성되기 전부터 잠재의식 속에 테러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자신도 모르게 심어져버린 것이다. 진짜 탓해야 하는 건 이 세뇌를 주도한 탈레반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교육의 최고의 영향력을 최악의 범죄에 악용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일수록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각'하고 깨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TV 시청, 라디오, 대화가 철저히 금지된 상황에서는 그 기회마저 빼앗기게 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조상들은 일본의 내선일체나 일선 동조론과 같은 억지 사상에 흔들리지 않도록 계몽에 막대한 힘을 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끈질긴 애국계몽운동의 노력으로 일본의 계략에 물들지 않고 우리 손으로 고유의 색을 지킬 수 있었다.
위의 이야기들을 우리 삶에 적용해본다면, '우리도 사회의 펜듈럼에 휘둘려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살도록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사실 이슬람 아이들이 자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과 한 사람이 자신의 색을 잃고 낫셀프로 살아가는 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테러 아이들이 자신이 배우는 내용에 대해 의심하지 못하고 그것만이 옳다는 판단하에 자신의 인생을 잘못된 곳에 바치는 것처럼, 우리도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만 맞추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판타지 세계에 가고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계속 그렇게 가다간 자살테러처럼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좀먹게 될 수도 있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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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개인 브랜딩(1인 기업)은 '트루셀프True-Self' 더하기 '전문성Professionalism'이며, 그 가치는 자유에너지에 비례한다. 자유에너지란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답게 살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므로 결국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건 얼마나 '나답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말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로, 내 삶을 100% 책임진다는 것. 내 디자인대로 살아간다는 건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계속 '고'하는 걸 뜻한다. 정신적 저항 뿐만 아니라 경제적, 육체적, 관계적 저항 등이 닥칠 수 있고 이 모든 걸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이런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독립성'을 길러야 한다. 사실 내 디자인대로 산다는 건 자연의 이치상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낫셀프의 세상 속에서는 트루셀프로 사는 게 낫셀프 펜듈럼을 벗어나는 행위이므로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독립성에 기반한 강한 정신력으로 내 고유한 디자인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Love Yourself', 이 말은 그저 있어보이고 평화로운 느낌을 내기 위한, 그런 여유로운 문구가 아니다. 여기엔 나의 '생존'과 삶의 질이 달려있기에 보기 보다 치열한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거듭된 수업과 휴먼 디자인 공부를 통해 이 말이 얼마나 강력하고 깊은 뜻을 담고 있는지 자각했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내 디자인을 수용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나의 디자인이 뭔가 부족해 보이고 어딘가 바뀌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수 있지만 내 디자인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잘 생각, 수용하고 그 통찰을 고유의 'True-color' 를 발현하는데 쓴다면 자연스럽게 '셀프 러브'하게 될 것이다.
트루셀프가 '생존'을 상징한다면 전문성은 '나의 길'을 나타낸다. 사실 전문성도 트루셀프 없이는 설명 불가하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하는 속도보다 언제 시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20대 중반에서 서른이 넘어가면 한국 사회의 특성상 나답게 살아야한다는 치열한 사고 없이 그저 그렇게 적당히, 남의 편견에 맞춰 전문분야를 정해버리게 되고 그로 인해 자유에너지는 없어질 대로 없어진다. 따라서 그 전에 나의 길을 찾고 그 준비를 시작해야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다. 첫 시작을 낫셀프에 기인한 마인드로 해서는 안된다.
각자의 디자인에 따라 자신의 전문 분야를 준비하는 방법, 속도는 다 다르다. 예를 들어 '휴먼 디자인'에서 프로파일에 4가 있는 사람은 사람을 통해 기회를 얻어가야 하고, 프로파일에 1인 있는 사람은 원리 탐구를 통해 천천히, 제대로 가야한다. 여기에 더해 각각 자신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주도권의 반응이 온다면 거기에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문성을 쌓는 과정 중에 주의사항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비교'. 사실 비교는 두 가지 의미에서 금물이다. '하지 말아야 할 비교'와 '되어서는 안되는 비교'. 전자는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궁극적으로 'Untouchable'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교를 하는 동안 나의 공부는 멈추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먼디자인을 통해 사람들 모두 고유한 디자인이 있음을 알았다면 낫셀프의 유혹에 빠져 남과 비교하거나 내 디자인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각자 가야하는 길, 잘 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 큰 틀 안에서 제시받았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내 고유의 강점을 전문성에 싣는 센스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을 뛰어넘어 'Untouchable'이 될 수 있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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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http://newspeppermint.com/2013/09/23/epfl/
학계의 펜듈럼.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의 목적은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이해하고, 진실을 찾으며, 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나는 이 진실을 찾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호한 정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학계에 들어와 가장 처음 배우는 것은 ‘너무 정직함’이 곧 ‘너무 솔직함’으로도 불리며 여러분의 단점으로 생각된다는 사실입니다. ... 사람들은 연구의 내용보다는 화려한 발표에 신경을 쓰며, 인맥 역시 부도덕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활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학계의 모든 비즈니스적인 측면을 알고 나면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연구가 가끔씩 나온다는 것에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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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펜듈럼은 사회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국가에서부터 심지어는 박테리아군까지 모두 하나의 펜듈럼이다. 이 많은 집단 중 현재 BU 수업내용과 관련해서 집중해봐야 할 곳은 바로 '대학'이다. 펜듈럼이 대학을 어떤 방향으로 가게 했는지, 어떤 파괴적 영향을 줬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말 펜듈럼은 도쿄대생들도 바보로 만들까? 일본의 지성,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저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통해 일본의 대학교육이 산으로 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을 통해 대학이라는 기관의 펜듈럼이 생겨난 역사, 어떻게 그 펜듈럼이 유지되어 왔는지, 펜듈럼이 대학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등을 알 수 있다.(우리나라 대학은 일본 대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도쿄대 이야기는 곧 우리나라 대학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의 대학은 본래 유럽의 명문 대학과는 달리 자치적 조직체가 아니라 국가의 여러 기관들의 이해가 얽혀서 만들어졌다. 당시의 정황 상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교양 인재를 육성하는 게 아니라 나라 발전에 헌신할 인재 육성에 초점이 맞춰지게 됐다. 즉 설립 역사에서부터 대학은 정치적 목적과 긴밀했다. 현 제도에 충실한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 목적이 이러하니 일본의 교육제도는 자연스레 획일적이고 중앙통제적으로 흘러갔다. 이로써 대학에서는 졸업 후 바로 국가와 기업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전문지식, 실용적 학문만을 가르쳤으며 우주, 인간, 사회에 대한 원리를 알 수 있는 학문들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대학은 진리 추구가 아닌 이익, 권력 추구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대학이라는 펜듈럼이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더 많은 지지자들을 유혹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입시제도, 학벌, 학점, 학파, 취업 등등. 이런 유혹을 통해 교육부, 입시생들, 사교육 시장, 교수 집단이라는 기존의 펜듈럼을 강력히 지지하는 새끼 펜듈럼이 생겨났다. 이것들은 대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관심 없어 보인다. 심지어 왜 입시제도가 존재하는지, 왜 대학에 가야하고, 왜 대학을 좋은 데로 보내야 하는지, 왜 진리를 가르쳐야 하는지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그저 펜듈럼이 만들어낸 법칙대로 행동한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고 그것이 최선이 아님을 의식적으로 인지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 펜듈럼이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갈 뿐이다.(이 점은 자유의지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어보인다.)
펜듈럼의 무서운 점은 자기 지지자들과 다른 펜듈럼 지지자 그룹이 대립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을 매우 정치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대학의 정치화는 학생들이 폭넓은 교양을 쌓는 걸 막고 복잡계 이론, 양자정보이론, 주역 등과 같은 원리적인 학문을 배우지 못하게 한다. 즉 '도쿄대생들'을 바보로 만든다. 예를 들면, 대입시험에서 이과, 문과생들은 각각 문과, 이과 과목수를 매우 적게 하거나 중학수준으로 시험치 도록 하는데 국립대학이 그렇게 시험을 내는 이유가,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모두 사립대학에 가기 때문이다. 또한 교양학부에는 전공학부와는 달리 독자적 인사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 당연히 접해야 하는 새로운 학문의 유입이 기존 학파의 텃세로 배척당하는 경우도 펜듈럼이 만든 대립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들로 꼭 배워야 할 걸 배우지 못하고 바보가 되는 것이다.
펜듈럼의 또 다른 무서운 점은, 펜듈럼은 사람의 약점(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취업을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가장 인기 있고 유망한 과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진짜 인생의 원리를 제시하는 학문을 접하지 못하고 전문 지식만을 수집하게 된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나만 옳다는 허영심, 자존심 때문에 학생들을 진리로 안내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한 채 밥그릇 싸움만 하게 된다. 펜듈럼은 진실, 본질로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파괴적이다.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펜듈럼의 규칙에 충실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졌는가? 펜듈럼은 지지자 개개인의 운명엔 관심이 없다. 오직 더 많은 에너지를 모으는 게 목적일 뿐이다.
펜듈럼의 존재를 인정하고, 게임 속에 빠지지 않고 바깥에서 관조하면 펜듈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의 경우, 대학 펜듈럼이 낳은 입시제도 펜듈럼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희생자였다. 그것을 벗어나고자 했을 땐 괴롭힘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코치님의 강의 및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펜듈럼에 대해 자각하고 적어도 대학 펜듈럼 속에는 더 이상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펜듈럼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게 되면 정보의 미개척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BU에서 배우는 내용이 바로 그런 지식이지 않을까 싶다. 펜듈럼은 오직 다른 펜듈럼으로 물리칠 수 있다. 나는 '다른 펜듈럼'으로 BU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이 BU 펜듈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지혜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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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펜듈럼'은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한 곳으로 맞춰 모아져서 생겨나는 에너지에 기반을 둔 정보체다. 생소한 언어로 표현했지만 '펜듈럼'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 고정된 방식들인 것이다. 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방사할 수 있는 모든 물질들은 '펜듈럼'을 생성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펜듈럼'으로 가득 차 있다. 파괴적인 '펜듈럼'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행동과 상황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의식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행복의 인생 트랙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저 에너지를 내주는 꼴이 된다.
'펜듈럼'의 목적은 더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그 지지자들로부터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므로 지지자들 개인의 행복은 바라지 않는다. '펜듈럼'은 우리의 이목을 끌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통해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소외된다는 불안감을 주는 방식 등으로 우리에게 자신들의 방식을 주입한다.
그렇게 주입된 지지자들은 '펜듈럼'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살만한 환경을 제공받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에너지를 주다가 '펜듈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면, 아무리 그 '펜듈럼'에서 특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지지자일지라도 머지않아 밀려나도 소외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펜듈럼'에 발을 들이면 죽을 때까지 그 '펜듈럼'에서 살던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펜듈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펜듈럼'에 대해서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그 '펜듈럼'을 우리의 인생 트랙으로 끌어드리는 일이 된다. '펜듈럼'은 그 고유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고, 그 주파수에 공명되지 않으면 에너지를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실행할 수 없고 수용도 잘 안되는 내용이지만, 우리를 관통하려고 하는 '펜듈럼'들을 우리는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함으로써 대처하거나 펜듈럼의 게임에 참여하는 척하면서 관조적인 자세로, 또 제3자의 느낌으로 펜듈럼의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 한다.
지속적인 알아차림과 훈련을 통해서 펜듈럼을 무시하고 관조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남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by T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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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나친 노력은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대상에 지나치게 큰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할 경우,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진다. 잉여 포텐셜이 나타나면 에너지가 불균형해져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균형력’이란 법칙이 일어나 이 잉여 포텐셜을 제거한다. 이 세상은 전체가 ‘펜듈럼의 집합’이라 볼 수 있는데, 이 복잡한 전체 시스템을 지배하는 법칙이 균형력이다. 균형력은 포텐셜을 만들어낸 의도와 반대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균형력으로 잉여 포텐셜을 없애는 것보다 나 스스로 없애는 편이 좋다. 중대한 의미를 부여받은 어떤 평가가 현실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을 때 잉여 포텐셜의 양이 더 커진다. 평가의 오류, 그 자체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잉여 포텐셜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첫 번째로, ‘불만족’이다. 스스로 자기반성하여 결점과 약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좋지만 그런 결점들이 마음을 괴롭혀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면 잉여 포텐셜이 생겨난다. 개인적 성취나 자질에 대해 불만을 품기도 하지만, 자신의 결점과 약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신도 불만스러워한다.
사소한 일에도 불만을 토하는 습관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소소하고 다양한 일들에서 끊임없이 작은 기쁨을 느끼는 습관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준다. 모든 불행은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인 것에서 좋은 점을 찾아낸다면 큰 노력을 들지 않고도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또 힘들 때,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못할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생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낡은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대처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작심 3일로 끝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작심 3일로 여러 번이 되면 3일로 끝나지 않는다. 각오를 자주 상기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습관을 바꾸는 ‘행’을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무언가 다른 것과 ‘대비’되고 ‘비교’될 때다.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도 여기에 포함된다. 모든 갈등은 비교와 대립에서 온다. 자만심으로 우쭐 거리는 사람이 약점과 결점이나 소박한 성취에 대해 업신여기는 태도를 가질 때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진다. 특히 상대방을 경멸하는 비판은 가장 강력하다. 비판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에게 비난을 할 권리가 없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둘 다 아주 전형적인 의존적 관계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비교된다. 자신을 주변과 비교할 때, 자신의 잘난 점을 입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래서 얻는 제 잘난 기분은 환상이다. 그와 반대로 자기완성은 진정한 미덕을 길러주고 에너지를 헛되어 낭비시키지 않는다. 목표가 미덕을 얻는 것이라면 그 의도는 그 사람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미덕을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우월감 콤플렉스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플러스 잉여 포텐셜을 창조하든 마이너스 잉여 포텐셜을 창조하든 에너지 차원에서는 결국 똑같다. 결점과 싸우거나 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겨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는 게 중요하다.
세 번째는 ‘욕망’이다. 어떤 것을 너무나 원하는 나머지 그것을 얻기 위해서 가진 것을 모두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잉여 포텐셜이 만들어지고, 균형은 깨어진다. 욕망은 세 가지 형태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 강한 욕망이 목적물을 가지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과 행동으로 바뀌는 경우와 둘째, 소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욕망, 그리고 셋째, 강한 욕망이 목적물에 대한 의존적 관계로 변하는 경우이다. 원하는 대상에 막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면 저절로 의존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욕망이 의존으로 변질되면 내면 깊은 곳에서 욕망이 성취되는 것을 믿지 않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반대로 된다. 예를 들어 뭔가를 회피하려고 하는 강한 욕망이 그 회피하려는 것과 마주칠 가능성을 높게 만들어준다.
소망은 오직 강한 욕망이 목적물을 가지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과 행동으로 바뀌는 경우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때의 욕망은 잉여 포텐셜 없이 순수한 의도로 변형된다. 순수한 의도란 과대평가 없는 상태에서 욕망과 행동이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바라는 대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인생 트랙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순수한 의도’의 ‘에너지’뿐이다.
네 번째, ‘죄책감’이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잉여 포텐셜이다. ‘올바른’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 때는 곱절의 잉여 포텐셜이 창조된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에 책임을 느끼는 근거 없는 죄책감은 가장 큰 잉여 포텐셜을 만들어 낸다. 그 죄책감의 원인은 스스로 지어낸 것이다. 죄책감은 항상 처벌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잠재의식은 그 시나리오를 따름으로써 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균형력이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인하고 있는 환경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뿌리 깊숙이 그 사상이 묻혀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것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동의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그들에게 자신보다 우월할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한다. 그들이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의 양심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당신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죄책감의 잉여 포텐셜을 해소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실수 인정하기, 죄 사함을 비는 기도, 신앙고백, 고해성사 등 이 모두가 죄책감의 잉여 포텐셜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다. 자신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가 내린 유죄판결에서 해방된다. 또 하나, 자신의 잠재의식에 숨어있는 처벌에 대한 생각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개인의 진정한 힘은 죄책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다섯 번째, ‘완벽함’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많은 관념이 머릿속에 심어진다. 그 관념들은 뿌리 깊숙한 곳에 묻혀 자기 인격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강박증이 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싸우는 대상은 균형력이다.
물론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려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면 균형력이 나타난다. 이것은 피드백 순환을 일으키기 때문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점점 더 심해진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나아가서 편집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역할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자기는 흠 없는 사람이며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항상 옳다는 느낌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것이고, 세상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고자 하는 의로운 욕망이 충분한 동기를 부여해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이 ‘운명의 결정자’는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처벌할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 순간 가장 강력한 잉여 포텐셜이 형성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점을 숨기기 위해, 없애기 위해 싸우는 데 노력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면 잉여 포텐셜을 만들어내는데 사용되는 에너지를 오로지 장점을 키우는데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인생 트랙도 좋은 쪽으로 향할 것이다.
세상과 조화롭게 지내고 펜듈럼에게서 벗어나려면 과도한 중요성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늘 자신과 주변 세상에 대해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붙잡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끌고 가도록 허용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일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운명은 ‘선택’이다. 자신만의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잉여 포텐셜을 유지하려는 막대한 노력으로부터 해방되면 균형력의 영향에서도 해방된다. 펜듈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직장에서도, 무엇을 함에서도 훨씬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문제에서도 벗어 날 수 있다.
소망을 성취하는 길에서 유일한 장애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중요성이다. 내적, 외적 중요성을 거부함으로써 선택의 자유를 얻는다.
by Ai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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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특히 교육 분야에서 시행착오가 격려되지 않는다. 특유의 성장지상주의적 마인드와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토 때문에 첫째로,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여유가 없다. 학생들에게 시행착오할 시간을 주는데 인색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 또한 학습은 교실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고정관념이 있어 '장소'면에서도 다양한 학습의 장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는다.
둘째로, 학생들의 잠재력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학생들은 지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설사 답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 안에서 얼마든지 의미 있는 능동적 학습이 가능하다. 하지만 학교 펜듈럼 속에서는 이러한 기회는 드물다.
한국 교육은 답을 맞추는 게 유일한 목적처럼 보인다. 그 과정을 12년이나 겪은 나로서는 답을 틀리거나 실수하는 게 아직도 죄처럼 느껴진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어떻게 실수가 빠질 수 있을까. 시행착오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배우지 말라는 것이다. 답을 맞추는 것보다 '과정', 즉 '시행착오'가 중요시되어야 한다.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고, 과정 자체가 다른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소스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식 교육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양의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기 위해선 학생들보다 선생님이 더 많이 공부해서 지식을 깔끔히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학생들은 시행착오할 기회가 뺏기게 된다. 우리나라 교육은 일방적 전달과 시행착오의 기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분배되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다이애나는 그런 면에서 선생님으로서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학생들을 가능성 가득한 존재로 보고 어떡하면 그것을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절대 배움은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펜듈럼에 휘둘려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다이애나는 이 두 사실을 강연을 통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by Aud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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