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단단한 그 무언가를 찾아서... 그 여행의 끝은? 

'철학적 사고로 배우는 과학의 원리' p.16~39



평평한 종이 위의 점, 직선, 평면을 다루는 도형의 학문인 유클리드 기하학. 유클리드 기하학의 토대 위에서 세상의 많은 도형들이 존립한다. 그리그 그 도형과 점, 직선의 바탕 위에 세상의 많은 것들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된 세상은 너무나 자명하게도 인간에게 단단한 가치를 제공한다. 그러나 더욱이 놀라운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완전 반하는 공리를 사용한 비유클리드 기하학 속에서도 그 틀안에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전함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세상은 시공간이 비선형적으로 접혀있고 구부러져있는 모습에 더 가까우므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더욱 우리 세계를 더 설명하기에 좋은 그림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이 더욱 대단하고 강력한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결국 각자의 공리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세계에서는 아름다운 견고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각자가 세상에, 우리 인간에게 주는 유용함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단단한 힘을 주고 발전시켜 나갈 학문적 토대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本은 '공리'이다. 즉, 증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히 자명한 법칙이라고 우리가 공동으로 정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약속을 통해 정의하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논리라는 토대로 정리한 것이 학문인데, 세상의 많은 모양을 정의한 그것 또한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기하학도 결국은 증명되지 않은 약속의 법칙으로 세워진 모래성이다. 그러나 그 모래성은 너무나 우리에게 유용하여 쓰는 것이다. 모래성이라는 표현이 그저 약해 보이는가? 우리는 근본의 성격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주는 수많은, 가치로운 힘을 떠올려 보아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증명되지 않는 공리를 완전하게 인간의 약속임을 인정하는 순간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몰지각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더욱 단단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견고하고 아름다운 모래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또 하나 고찰해볼 가치가 있는 것은 '논리'는 과연 '논리적'인가?에 대해서. 논리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해볼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루이스 캐럴의 패러독스를 떠올릴 수 있다. 아킬레스는 멍청한 거북이에게 어떤 명제가 논리적으로 올바름을 강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B이고, B=C이면 A=C이다~!"

"왜? 이게 왜 논리적이야?"

"당연한 것을 왜 이해 못하지...?"



사실 이는 A=B, B=C를 약속, 즉 공리화하고 이렇게 전제 2개가 맞다고 할 때, C=A라고 하자는 것까지 전제 3으로 공리화할 때 하나의 논리 체계로 우리가 정하는 것이다. 즉, '논리'라는 것도 우리가 공리 위에 기반한 새로운 공리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논리적이라는 말로 너무나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즉, 논리적 사고라는 것도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공리 위의 신념으로써 학문을 펼쳐나가는 데에 유용한 언어체계는 맞지만 이것이 진리를 알 수 있는 방식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미 논리의 기본에는 '비약'과 '모순'이 깔려있다. A는 근본적으로 A일 수밖에 없으며, B도 결국 근본적으로 B일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A=B라는 약속으로, 비약과 모순을 함유한 공리로 전제를 하지 않는가. 이미 이러한 의미를 약속하는 것과 의미의 앎은 전혀 다른 얘기이다.


모순적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우리는 논리와 같은 하나의 언어체계로써 절대적으로 모순을 모순이라 표현할 수도 없다. 모순이 무엇인가? 우리가 약속한 표현의 방식이지 않는가. 앞에서 말한 '논리'를 우리는 약속하여 만들어내었고, 그 표현방식이 적용되지 않았을 때 '모순'이다!라고 한 것이지 않는가.


'논리'도 '모순'도 우리는 모두 약속으로 만들어낸 '공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때, 공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는 다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런 의미에서 논리, 모순과 같은 표현방식 안에서 서로를 헐뜯고 괴롭히고 잘난척하는 이 모든 과정은 공동의 룰 안에서 스스로 만든 방식에 갇혀버리는 꼴과 같다. 즉, 이 모든 것은 우리도 몰랐던 '자작 연출'인 셈이다. 한 편의 연극 같은.


그럼 우리가 이런 언어적 표현 말고, 눈으로 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는 '선'을 본 적이 있을까? 삼각형, 사각형, 면 이런것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 내 주변의 편한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너무나 당연히 확고한 태도로 어이없다는 듯, "무슨 말을 하냐? 그걸 안 본 사람이 있냐?"


플라톤은 이데아론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부분에 대해 새롭게 다가가도록 도와주었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관념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삼각형의 완전한 이데아 속의 관념을 현실에서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각자의 관념과 심상과 내면으로 발현하여 그려내지만 결국 그것이 완전하고 완벽한 진실한 이데아 속 이상의 삼각형은 아니라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우리는 관념의 세상에서 그것의 투사물을 보는 것이지 그것의 완벽하고 진리의 본질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떠했는가? 본다는 것의 능력에 함몰되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면서 우주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결국 보는 것만 믿으려 하는 철저한 사실주의자들에게 이 내용은 엄청난 협박일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목숨을 내놓으라는 압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할 수밖에 없는 한마디.


"본 것 밖에 믿지 않겠다고 하는 너, 평생 이 세상을 본다고 착각하며 살겠지"


그렇다면 이 관념적인 세상을 다시 간단하게 둘러볼까. 다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두드리고 있는 노트북의 키보드도 단단한 플라스틱과 철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을 받치는 카페의 테이블은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동시에 이 카페의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있고 이 글을 치는 '나' 라는 사람은 분명한 경계가 있는 피부로 장기로 피로,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눈에 확고하게 보이고 심지어 우리는 만질 수 있다. 의심할 여지를 도저히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 '물질'이라는 단어를 잠깐 섞어볼까. 나는 물질인가? 테이블은 물질인가? 노트북은 물질인가? 노트북은 대략 키보드와 모니터, 핸드패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자세히 보니까 플라스틱과 철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플라스틱과 철을 더 쪼개어보면 플라스틱과 철 원자로 나뉘어진다. 여기서 철 원자에 더 집중하여 보자면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물질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잠깐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하나 고찰해볼 것이 있다. 우리가 노트북을 키보드와 모니터로 크게 구분할 수 있듯,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제작한 방식에서의 약속된 표현이다. 그렇다면 철 원자에서 원자핵과 전자는 우리가 표현한 하나의 공리적 표현 아닌가. 물론 그 존재는 존재했지만. 잠깐 그렇다면 결국 모두 쪼개어 쪼개어 우리가 물질을 정의할 때, 결국 물질이란 것을 말할 때 절대적 기준은 애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표현할 수 있는 공리적 방식에 의해 물질은 너무나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된다. 그 가능성의 영역은 무엇인가? 물질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공리적 기준으로 물질을 표현 가능한가.


결국 "이 세상, 단단한 그 무언가를 찾아서...그 여행의 끝은?"의 답은 우리가 정하기 나름이라는, 아니 어쩌면 정할 수 없어서 정해야 하는 그런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 여행의 끝을 아는 것이 결코 단단함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이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세상에 더욱 단단해지는 힘, Inner Force의 함유법 아닌가. 그래도 난 지금도 기대한다. 어리석다고 해도 기대한다. 이 세상, 단단한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by Terius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