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성

BU_class 2014. 4. 6. 21:55

과학에서의 이원론은 14c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과 함께 본격적으로 태동되었다. 이 때부터 유럽인들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대해 탐험하기 시작한다. 열정적인 탐험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엔 측정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들이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지녔고 그로 인해 증명 또한 불가했다. 하지만 300년 후 17c에 '관측'이라는, 누가 봐도 객관적인 결과를 내는 실험 방법이 도입되면서 20c까지 과학에서의 이원론(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은 유럽인들의 열광적 지지 속에서 절대적인 불변의 사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10년부터 약 20년간의 과학의 새로운 발견은 근대 과학이 그 바탕을 쌓아온 300년이라는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광전 효과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막스 플랭크와 아인슈타인의 연구에서부터 슈뢰딩거의 양자역학 이론의 구축까지, 더 이상 과학에서의 이원론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훅을 날린 이론은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켄 윌버의 해석에 따르면) 과학에서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객관적 측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걸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주 작은 전자의 움직임을 측정할 때 '도구로 측정하는 행위'(주체)로 인해 전자(객체)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 측정하는 주체와 측정을 당하는 객체가 완전히 분리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불확정성의 원리를 포함, 약 20년간의 양자 혁명의 흐름은 기존 물리학에서 절대적이었던 '이원론을 통해 무엇이든 측정 가능하다'라는 신념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원적으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과연 무슨 말일까? 물리학에서의 이원론은 또 다른 과학 분야인 양자론을 통해 잘못된 것이라고 판정 받았는데, 일상에서 보거나 실제로 존재하는 좋고, 나쁨, +와 - 같은 이원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물리학의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원성' 역시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은 이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인 게 맞으며 이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까? 이 모든 물음은 이원성에 대해 '구조적으로' 살펴볼 때에만 답이 내려질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원성'이라는 이름 아래 묶는 것들은 사실상 두 가지 맥락이 존재한다. 하나는 +와 -, 음과 양, 남과 여 같이 본래 그렇게 이원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다른 하나는 좋다와 나쁘다, 주체와 객체, 문과와 이과같이 우리의 신념이 개입된 것. 전자는 우리가 약속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우주가 본디 이원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사실 관측하지 않아도 우주는 이원성에 의해 돌아간다. 하지만 후자는 우리의 판단과 암묵적 약속 이후에 생겨난 하나의 신념이다. 위에서 언급한 근대 물리학에서의 이원론은 후자에 속한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이 세상은 이원적으로 존재하는 게 자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것은 판단으로 인해 생기는 2차적 이원성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나였던 걸 분리된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애초에 좋고 나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잘렸을 때 아마 대부분은 이 일을 '나쁜' 일로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회사에서 해고당함으로서 생기는 또 다른 기회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우울함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회사에서 잘리는 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경험 그 자체'이다. 우리가 어떤 일은 좋고, 어떤 일은 나쁘다고 '구분'짓는 순간 전체를 보는 건강한 눈은 사라져 버린다.

언어는 좋다, 나쁘다는 등의 개념을 만들어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유용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유용한 만큼 위험도 커진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유용함, 위험함도 2차적으로 구분 지은 이원적 표현이다.) 어떤 것이 진짜 이원적으로 존재하는지, 어떤 게 편의상 만들어진 이원성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2차적으로 생긴 이원적 표현들이 '나쁘다'라는 게 아니다. 또한 그것을 안 쓰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위의 사실들을 자각하고 사용한다면 그 표현을 통한 유용함을 취하며 동시에 쓸데없는 고통에 빠지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by Audrey

posted by BU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