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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U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BU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BU는 21.5세기를 위한 '창조적 지식'을 위한 곳이다. BU는 진짜 공부의 줄기를 잡아준다. BU는 그러나 양적인 공부는 해주지 않는다. 이는 각 개인의 몫이므로. BU가 실현하는 공부 방식은 이러하다. '양과 질'을 동시에 흡수하는, 추구하는 방식. 그것과 더불어 일정한 기간 동안 '음미'를 해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내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최고의 공부'라는 책에서 켄 베인이 말하듯 공부는 '태도'에서 많은 것이 좌우된다. 그리고 그 '올바른 태도'는 자신의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진정성 있게 선택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자기 스스로 진솔하게 의도하는 '공부', '지식'이 아니면 이미 양과 질, 음미, 응용... 이런 것들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진정성 있는 學의 길로 인도하고 스스로 존립 가능케 하는 참 사부師父로서의 학교다. 물론 사부師父도 있다.(Mr.Paul) 그러한 점에서 BU의 공부는 나에게 진짜 공부를 가르쳐줄 유용한 배움터이다. 양과 질, 음미... 아직은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조건화되어온 공부Style은 '결과'가 목적이 되는 '학점'이 목적이 되는 '등급'이 목적이 되는 그런 껍질을 핥는 식이었으므로.
물론 '결과'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에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16-23절 말씀 묵상] 이러한 구절이 있듯(난 종교가 없지만) 일의 결과는 언제나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현재 사회에서 조건화된 더러운 공부법은 내게 허술한 열매만을 안겨줄 것이니. BU는 내 인생의 참 열매를 맺는 그러한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그 방법은 내가 해온 습으로 인해 더 힘들 수도 있다. 농약 범벅 농사법보다는 건강한 유기농 농사법이 더욱 많은 땀을 요하듯 처음엔 더 늦어 보일 수 있다. 더 피곤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에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1세기는 창조적 지식사회이다. 『창조적 지식사회』
그러면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실체』, 『지식의 본질』
당연한 말이었지만 충격적이었다. 21세기 창조적 지식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지식'의 本에 대해 알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불패이듯, 나를 알고 지식의 실체와 본질을 알아야만 배움에 능하게 된다. BU는 나에게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학교다.
2. 인간의 '언어' 가 폐쇄적인 원을 가르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Mind로 정의한 공리에서 탄생한다. 개를 개라고 하고, 고양이를 고양이라 하는 Mind의 정의 + 공리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돌고 돈다. 대백과 사전의 두께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국어사전을 보라.
A를 설명하려면 B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C를 설명하려면 D라는 어휘가 필요하고,
...
Z를 설명하려면 A라는 어휘가 필요하다.
단편적으로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보았다. 즉, 언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A와 Z라는 언어는 현상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그들 간에 배타적으로 보인다 하여도 결국 돌고 돌아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 진실은 '언어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언어는 예외 없이 상대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언어'라는 것은 '맥락'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존재다.
자,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녀석으로 기술되고 정리되는 '개념槪念'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것인가? 이쯤 되면 계산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절대적으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개념은 없다. 개념은 인간의 Mind로 공리화한 언어 텃밭과 논리 속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 또한 언어와 같이 절대적일 수 없는 놈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에 대해서도 다시 볼까.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언어와 절대적으로 예외 없이 상대적인 개념이 '학문'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학문'은 예외 없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Mind로 정의한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적인 진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 이것이 이 학문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학문은 우리 인류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다. 무엇의 목적으로? '실용성' , 이것이 학문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성과 언어, 논리로 기술되는 학문은 그저 삶의 유익한 Skill, Practical Solution을 주는 역할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학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자의적으로 돈과 관련하여 구분 지을 수는 있으나 엄연히 다른 말이다. 그리고 옳지 못한 표현이다. 세상의 '학문學問'은 실용성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이상의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순 없다.
그럼 여기까지의 맥락에서 다시 '언어'의 포인트로 돌아오자면, 인간의 언어는 실용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특히, 학자라면 자신의 영향력만큼 언어의 사용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언어가 실용적일수록 그만큼 위험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문을 다루고 그 속에서 유익을 맛보는 인류는 한편으론 학문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WHY? 학문은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학문을 한다고 하면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밝혀 줄 것이란 희망 속에 산다. 그리고 그런 생각 속에 다른 것들을 도외시하고 잘 돌아보지 않게 된다. 내가 하는, 내가 주장하는, 내가 믿고 있는 이 개념, 학문은 절대적이니까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기서 적지 않은 위험요소들이 그 자신을 거꾸로 고립시키기도 한다. 많이 공부할수록 똑똑해지지만, 동시에 여러 위험도 생겨난다.
인간의 'Mind'와 '학문學問'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은 우리에게 어떠한 화두를 던지는가?
수 많은 학문을 접하게 되고 실용성을 이끌어 내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함을 인지하여 즉 '내려놓음下心'으로 절대성을 내려놓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태도Attitude'로부터 비롯되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므로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케 하려면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받아들이게 되면 지식의 본질, 실체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 가능하다. 지식을 학學하기 전에 지식의 본질, 실체를 알아야 실용성에 대한 유의미하고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이는 '절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공부의 첫 순서, 첫 단추다.
by T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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